(중앙일보 05.12.07)[논쟁과대안] 4년 임기 '과거사 위원회' … 숙제는 무엇인가
"굴절된 현대사 정리 역할" "반목보다 화합 선도해야"
1일 출범한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에 대해 기대와 우려가 동시에 쏟아지고 있다. 과거사위는 향후 4년간 한국 현대사를 사실상 다시 쓰게 된다. 진보 진영은 "과거 국가 권력에 의해 억울한 피해를 본 사람들에 대한 명예 회복이 이뤄질 것"이라는 입장이다. 반면 보수 진영에서는 "15명의 위원 중 과반수(8명) 추천권을 가진 정부.여당이 역사를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재단할 것"이라는 반발이 나온다. 위원장을 맡을 송기인 신부가 "미군 철수를 위해서는 서울.평양이 저 사람들(미국) 몰래라도 긴밀히 결속해야 한다"고 한 것을 놓고서도 말이 많다. 여야 정치권과 학계 전문가들로부터 과거사위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들어봤다.
과거사의 진실을 규명하면서도 화해를 끌어내는 방법은 무엇일까. 왼쪽부터 신지호 교수, 이인기 의원, 강치원 교수, 문병호 의원, 오유석 교수. 변선구 기자
▶강치원(사회)=우선 과거사위가 과연 필요한지, 필요하다면 지금이 적기인지 대해 논란이 있는 것 같다. 기존의 과거사 관련 12개 위원회와 중복된다는 지적도 있고, 국민적 관심이 없다는 말도 있다.
▶문병호=우리 역사는 단기간에 엄청난 진폭이 있었다. 근대화의 긍정적인 측면이 많지만, 역사의 굴절된 측면에 대해서도 한번쯤 정리가 필요하다. 과거를 정리함으로써 미래로 향하기 위한 디딤돌을 만들자는 것이다. 당초 여당이 주장한 과거사 진상규명은 '역사 사(史)'자가 아닌, '일 사(事)'자를 쓰는 것이었다. 과거의 인권침해 사건에 대해 진상규명을 하자는 것이지, 역사를 다루자는 것이 아니었다. 이를 역사 문제로 비약시킨 것이 한나라당이다.
▶오유석=기존의 과거사 관련 위원회가 개별 사건별로 12개나 되다 보니 너무 산만했다. 또 이들 위원회에 실질적 권한도 없었다. 이번 과거사위는 실질적 권한과 책임을 가지고 기존 위원회들로 미흡했던 과제들을 다루게 될 것이다. 과거 청산의 힘은 항상 정치적 결단에서 나왔다. 국민적 관심이 없다고 하지만 온 국민이 과거 청산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다. 지금도 너무 늦었다. 이 문제는 다음번에 한나라당이 집권하더라도 무를 수 없는 역사적 과제다.
▶이인기=굴절된 역사를 바로잡을 필요성은 공감한다. 그러나 정치와 권력이 개입해선 안 된다. 그래서 당초 한나라당은 과거사위가 아닌 중립적 학술단체에 이를 맡기자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일단 법이 통과돼 과거사위가 출범했으니 위원회를 객관적으로 구성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그러나 지금 청와대.여당 추천 몫의 위원장.위원들의 면면을 보면 과연 중립적인 운영이 가능할까 의문이다. 그분들의 평소 발언을 보면 편파성이 심각하게 우려된다.
▶신지호=과거사 진상규명이 필요하다는 데는 동의한다. 그러나 지금이 그 적기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노무현 정부는 지난 몇 년간 국정 과제 중 과거사에 과도하게 집중해 왔다. 현재 국민이 겪는 고통, 미래에 발생할 것으로 예상되는 고통을 줄이는 것이 정부.여당의 본령이 돼야 한다. 더 큰 문제가 과거사 문제를 정략적으로 접근한다는 것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을 다루는 것부터가 그렇다. 이 시기에 개혁을 하려면 미래건설형 개혁이 돼야지, 과거청산형이 되면 안 된다.
▶사회=위원회의 구성과 위원장에 대해 이견이 있는 것 같다. 위원장을 맡을 송기인 신부의 역사인식에 대해 특히 그런 것 같다.
▶이인기=국무총리 산하 '광복 60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가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응답자의 77.7%가 '과거사 정리'보다 '사회 안정'이 중요하다고 답했다. 정권이 현재.미래의 일도 감당하지 못하면서 과거의 일에 국력을 쏟는 것은 매우 잘못됐다. 특히 위원장과 몇몇 위원이 대한민국의 근.현대사를 기득권과 반 기득권의 대립으로만 보는 것이 문제다. 그러니까 국민이 반감을 갖는 것이다. 송 신부는 국민이 보기에 편향된 인식을 가진 분이다. 스스로 사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문병호=언론에 보도된 한 문장을 가지고 송 신부가 역사적으로 편향됐다고 주장하는 것은 곤란하다. 송 신부를 비롯한 위원의 면면을 보면 다들 충분히 과거사 위원으로 역할을 할 수 있는 분들이다. 또 국회와 국민이 지켜보고 있다. 그분들이 제대로 할 것으로 믿으며, 그렇지 않을 경우 나도 이의를 제기하겠다. 이 의원이 거론한 여론조사는 '밥 먹는 게 중요하냐, 과거 청산이 중요하냐'고 물은 것이다. 당연히 밥 먹는 게 중요하다는 답이 나온다. 그러나 과거 청산의 필요성 여부를 묻는다면 국민의 70% 이상이 찬성할 것이다.
▶신지호=촌철살인이라는 말이 있다. '키 워드' 한마디를 보면 그 사람의 생각을 알 수 있다. 평양과 서울이 손을 잡아서라도 미국을 쫓아내야 한다는 분이 위원장으로 있으면 김일성에 의한 남침이라는 한국전쟁의 근본 원인조차 건드릴 수 없다. 근본 원인을 못 건드리는데 이로 인해 파생한 결과를 어떻게 제대로 다룰 수 있겠나.
▶오유석=문제의 본질에서 벗어난 논의다. 설령 송 신부가 역사적으로 좌편향이고, 친 노무현 인사라 하더라도 위원장으로서 역사를 왜곡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국회에 대한 보고 의무가 있기 때문이다. 국민의 대표성을 가진 국회의원들이 과거사위의 보고서를 놓고 정식으로 논쟁하면 되지 않는가.
▶사회=조사 대상과 범위에 대해서도 논란이 끝나지 않은 듯하다. 과거사 정리 기본법에는 한국전쟁 전후의 민간인 집단 희생사건과 권위주의 정권 시절 이뤄진 인권 침해,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정한 세력에 의한 폭력.학살, 항일독립운동과 해외동포사 등으로 돼 있다. 이 같은 내용에 문제는 없나.
▶신지호=현 정권이 이중 잣대를 가지고 있는 것이 문제다. 이를테면 친일파를 청산하자고 하면서 이미 죽은 자의 50년도 더 지난 과거를 캐내자고 한다. 그러나 1980년대 대한민국 헌법체계의 근본을 부정한 주사파 등의 세력에 대해 얘기하자고 하면 매카시즘이라고 몰아붙인다. 또 한국전쟁을 일으킨 김일성의 전범 책임을 추궁하지 않고 무슨 진상 규명을 하나. 인민군이 사람을 죽인 것과 국군이 죽인 것이 행위 자체는 등가로 볼 수 있을지 몰라도 후자는 정당방위적인 측면이 있다.
▶오유석=현 과거사법의 가장 큰 목적은 국가 권력에 의한 중대한 인권침해를 규명하는 것이다. 진실규명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북한군에 의한 우리의 피해를 조사한다는 것은, 국군에 의한 북한의 피해도 미래에는 조사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는 방식이 돼야 한다.
▶이인기=법에 뭐가 들어가고 안 들어가는 것보다 균형감각이 문제다. 남한 정권에 의한 인권 침해가 중요하다면 북한 정권에 의한 인권 침해도 중요하다. 45년부터 53년 사이에 북한 정권에 의해 저질러진 인권 침해도 같은 수준에서 다뤄져야 한다.
▶문병호=이 법의 취지는 과거에 있었던 국민의 인권 침해를 다루자는 것이다. 그것이 국가 권력에 의한 것이든, 국가 공권력을 부인한 세력에 의한 것이든 똑같다. 그래서 한나라당의 주장을 일부 수용한 것이다. 그러나 핵심은 국가 공권력에 의한 인권 침해 부분이다. 이를 밝힘으로써 국민 통합을 이루자는 것이다.
▶사회=조사 후 처리는 어떻게 해야 하나. 이미 확정 판결이 난 사건에 대한 재심 요건 완화 문제도 있고, 명예회복과 배상 문제도 있다. 가해자에 대한 처벌 여부도 논란거리다.
▶오유석=원칙적으로 책임자 처벌의 가능성은 열어놓아야 한다. 가해자를 꼭 처벌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정확한 진실규명을 위해서다.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도 진실과 처벌을 교환하는 방식으로 과거사 규명이 진행됐다. 가해자가 진실을 말하면 처벌을 면제하는 방식이다. 물론 가해자뿐 아니라 피해자의 위증도 처벌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놓아야 한다.
▶문병호=학계에서는 그렇게 주장할 수 있을지 모르나 여당 입장은 다르다. 과거사 조사를 통해 진실을 밝히고, 미래로 나아가자는 것이다. 가해자 처벌은 할 수 없다. 현재 여당이 낸 반인권적 국가범죄 공소시효 특례법도 시효가 만료된 사건에 대해 처벌하자는 것은 아니다.
▶신지호=인혁당 사건 같은 경우는 명예회복과 배상이 이뤄져야 한다. 그러나 간첩을 민주 투사로 둔갑시킨다거나 하는 일이 있어선 안 된다. 처벌이 목적이 될 경우 진실.화해는 이뤄지지 않는다. 과거 군사독재 시절 이른바 민주화세력이 독재정권을 향해 "역사를 두려워할 줄 알아야 한다"고 했다. 지금 이 말을 현 정권에 돌려주고 싶다.
▶이인기=어떠한 경우에도 처벌은 안 된다. 처벌 가능성을 열어놓는 방향으로 가느니 과거사위를 안 하는 게 낫다. 반목과 갈등 없이 국민통합과 화해를 이끄는 방향으로 가야 하는데, 그렇게 되기 어려울 것 같아 걱정이다.
정리=김선하 기자 <odinelec@joongang.co.kr>
사진=변선구 기자 <sunnin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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