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적'의 올바름과 '진단'의 오류
[최장집 교수 비판①] ‘헤게모니의 정치’와 ‘진보적 민중주의’
참여정부의 위기, 혹은 한국 민주주의의 위기, 진보의 위기에 대한 올바른 관점을 갖는다는 것은 현 시기의 대단히 중요한 지적 과제이다. 최근 최장집 교수는 일련의 정치상황에 대해서 무게 있는 발언과 글을 내놓고 있다(경향신문 인터뷰 2006년 9월 28일, 한겨레신문 인터뷰 2007년 1월 22일).
나는 최교수가 참여정부의 문제점과 현 단계 위기의 ‘현상’을 지적하고 기술하는 것에 대해서는 거의 대체로 동의한다. 그러나 위기를 구성하는 요소들 간의 관계, 그것에 기초한 대안적 진단에 대해서는 많은 문제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최교수의 시선과 제언은 그 자체로 현 상황에 대한 하나의 해석유형이다. 그러나 상이한 해석들이 제출되고 그것들을 둘러싸고 치열한 논쟁이 있어야 현 상황에 대한 올바른 분석과 대안적 사고가 가능하다고 생각되기 때문에, 다소 예각적으로 최교수와의 차이를 드러내는 방식으로 서술하고자 한다.
‘참여정부의 실패 그리고 정권교체의 당연한 수용’의 문제의식
▲ 성공회대 조희연 교수
나는 단적으로 최교수가 이야기하는 것처럼 ‘참여정부의 실패 그리고 정권교체의 당연한 수용’ 수준으로 우리들의 문제의식이 왜소화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최장집교수의 최근 일관된 상황 지적은 노무현 정부가 실패했다는 것이다. 실패에는 참여정부 집권주체들의 무능력과 비개혁성, 실책 등의 문제가 거론된다.
또한 실패를 입증하는 중요한 현상으로-최교수가 ‘노동없는 민주주의’로 압축적으로 표현한-사회경제적 불평등의 심화, 양극화의 심화, 대중생활의 파괴 등이 거론된다. 이 점에 대해 나는 대체로 동의한다.
내가 여기서 제기하는 문제는 “다른 경로는 불가능했는가, 다른 경로를 밟기 위해서는 무엇을 했었어야 하는가, 참여정부와 다른 진보세력이 집권하였을 때 동일한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서 무엇을 혁신해야 하는가”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 나는 최교수에게서 나는 해답을 발견하지는 못하고 있다. ‘실패했으면 정권교체 되는 것이 당연하다’라고 하는 현실적 제언을 듣게 된다.
물론 최교수는 다원적 선거민주주의에서 정권교체는 자연스러운 것이고 그 틀 내에서 경쟁하여야 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민주주의의 본질이라고 말하고자 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는 사실 당연하고 우리가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87년 6월 민주항쟁 이후 사실 우리 사회에는 선거민주주의가 국민적 합의로 정착되어 있다. 그러나 현재의 위기를 선거민주주의의 준칙을 지켜야 한다고 말하는 것으로 논의하는 것만으로 해명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정당정치의 역할을 위협하는 운동의 과잉?
최교수의 인식의 근저에는 민주주의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정당정치의 활성화와 정상화라고 하는 문제의식이 존재한다. 민주주의의 공고화의 핵심적 과제라고 할 수 있는 ‘대표체계의 민주화’를 포함하는 ‘제도정치의 정상화’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것, 그리고 참여정부는 이를 위해 노력하지 않았다는 것이 최교수 인식의 근저에 놓여있다.
최교수는 ‘사회의 광범위한 갈등이나 이해관계가 정당에 의해 대표되고 의회가 민의의 대표기구로 구실하는 것이 민주주의’의 근본인데, 참여정부는 “정당정치를 통한 사회적 이해관계를 수렴하지 못하고 대통령이 당과 국회를 우회했다”고 평가한다.
또한 민주주의가 공고화되려면 사회적 갈등들이 제도정치 내로 수렴되어야 하는데 여전히 거리의 정치가 지배하고 있다고 보고 있다.
지금까지 한국에서 ‘운동의 동력에 의한 민주화’가 진전되어 왔지만, 이제 시대가 전환되었음에도 사회운동 나아가 제도정치에 진입한 운동 출신 민주진보세력(그 일부로서의 386 정치인들)이 관성적으로 운동에 기대는 방식으로 행위하고 있기 때문에, 정작 민주주의의 공고화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최교수는 ‘운동으로서의 민주주의의 위기’, 즉 제도정치의 정상화를 위협하는 운동정치의 과잉을 우려하고 있다(최장집, “"운동으로서의 민주주의, 위기에 서다", 프레시안 5주년 기념강연회, 2006. 9. 29. 한국노동사회연구소 회의실; 이에 대한 논평. 이광일, “진정 ‘운동으로서의 민주주의’가 위기인가”, <레디앙>).
이런 인식 위에서 사회적 갈등을 흡수하는 제도정치의 안착이 중요하고 그 제도정치적 룰이 무엇보다 중요하기 때문에 참여정부의 실패를 인정하고 정권교체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한다.
이를 막기 위한 노력, 예컨대 한나라당의 집권을 막기 위한 노력은 “두려움을 동원하여 재집권하려는 편법’이 된다. 그는 ‘재집권 욕심을 가져서도 안 된다”고 조언하고 있다.
나는 참여정부와 열린우리당의 실패를 포함한 최교수의 현상 지적에 대해서는 대체로 동의하지만 그 위기는 최교수가 지적하는 인과관계와는 정반대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현 단계 한국 민주주의 위기의 원인들은 여러 가지이며 위기의 성격은 복합적이다. 그러나 나는 내가 존경하는 최교수와의 쟁점을 분명하게 드러내기 위하여 그의 서술 속에서도 드러나고 있는 현상적 요인 3가지를 중심으로 논의를 전개하고자 한다.
그 3가지 요인 중의 첫째로, 참여정부 집권세력들의 무능력이나 준비 안 됨, 비개혁성, 반정치적인 언술, 원숙하지 못한 행위양식 등 많은 주체적 문제점들이 있다.
둘째는-참여정부 집권세력이 불만을 토로하는-정치사회적 보수와 이른바 조중동으로 상징되는 미디어 보수의 저항과 비판이다. 이를 최교수는 ‘실패의 알리바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셋째는 참여정부 개혁의 파괴적 결과로서의 한국사회의 극단적인 양극화와 불평등화이다. 이러한 위기 구성요소들의 상호관계에 대한 최교수의 진단에 대해서 나는 동의하지 않으며 실제와는 전도(顚倒)된 진단이 내재해 있다고 생각한다.
참여정부의 진정한 실패의 원인 3가지
쟁점을 분명하게 드러내기 위하여, 먼저 나의 의견을 요약해보자. 이러한 세 가지 측면에서 참여정부 주체세력들은 실패했다. 대체로 동의한다. 그렇다면 왜 실패했는가.
첫째의 실패요인과 관련하여, 나는 참여정부 집권세력들은 ‘자기정체성의 정치’에 대해서만 집착했지 ‘헤게모니의 정치’에 대해서 고민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동시에 진보 일반의 문제이기도 하다.
둘째의 실패요인과 관련하여, 보수적 저항을 뛰어넘어 ‘진보적 민중주의’에 대해서 고민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셋째의 실패요인에 대하여, 나는 진보적 민중주의의 내용이라고 할 수 있는 ‘사회경제적 개혁주의’를 보다 급진적으로 구현하지 못했기 때문에 실패했다고 본다. 나아가 사회경제적 개혁주의를 구현하는 ‘지구화 시대의 대안적 사회국가’ 모델을 안출(案出)하고 실험해보지 못했기 때문에 실패했다고 본다.
그리고 이러한 점은 참여정부의 주체들의 문제만이 아니며 최교수와 우리 자신, 민주진보세력 일반의 한계를 반영하는 것이며, 최교수가 이야기하는 것처럼 제도정치로 갈등을 수렴하려는 노력을 않아서가 아니라, 오히려 보수적 저항, 지구적인 거시적 제약을 돌파하는 사회적 힘 혹은 비(非)제도정치적 힘을 형성하지 못해서 실패했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차례로 하나하나의 문제를 자세하게 검토해보기로 하자.
첫째, 현 단계 한국 민주주의의 위기 및 참여정부의 실패를 규정하는 참여정부 집권세력들의 주체적 문제를 보기로 하자. 이러한 문제점은 집권세력들의 행태의 문제로 나타나기 때문에 누구나 쉽게 인지하고 있다.
물론 둘째와 셋째의 실패요인 역시도 첫 번째 주체의 문제로 환원될 수 있다. 즉 보수세력의 비판이나 저항 때문에 개혁을 못했다는 식의 불만은 결국 주체들의 문제를 말해주는 것에 다름 아니며, 셋째 신자유주의적 지구화와 같은 요인 때문에 양극화가 확대되었으므로 자기들은 책임이 없다고 하는 것은 무책임하고 적절하지도 않다.
참여정부와 ‘가혹한 단절’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러나 둘째와 셋째의 문제에 어떻게 대응하였기 때문에 실패했으며 또한 어떻게 응전했었어야 하는가라는 점에 대해서 최교수에게서 해답을 찾기는 어렵다. 단지 결과적으로 상황이 이렇게 악화되었으니 잘못이라는 설명을 듣는다.
나는 참여정부를 옹호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나 역시 참여정부와 ‘가혹한 단절’(민주사회정책연구원 토론회, ‘대선 전망 갑론을박’, 2007년 1월 10일, 국가인권위원회 토론방)을 주창하고 있다.
그러나 비판만 한다고 쟁점이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어떤 의미에서 민주노동당이나 진보세력 같으면 어떻게 했었어야 할까 하는 ‘이입(移入)적 관점’이 필요하고 그래야 대안적 진단이 나온다고 생각한다.
나는 단적으로 이 3가지 문제 모두가 민주진보세력 일반에 내재하는 문제이며 우리가 새로운 사고를 하지 않는 한, 참여정부의 주체의 문제로 환원함으로써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고 본다.
사실 참여정부 하에서 과거청산이나 ‘탈권위주의적 리더십’-그러나 권위를 상실했다고 하는 비판이 있지만-의 추구, 검찰 등 국가공안기구의 정치적 통제의 포기 등은 참여정부 이후에 평가받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국민정부가 임기가 끝난 이후에야 비로소 여성부 신설이나 국가인권위 설치가 평가받게 되었듯이 말이다.
그리고 때로 나는 사실 노대통령의 언술을 보게 되면 어떤 점에서 경탄스러운 점이 있다. 대통령의 지위에서 저런 정도의 ‘진정성’을 견지하면서-물론 이에 대해서는 고도의 정략적 언술로 해석하는 사람도 있다-발언하고 행위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해서 놀라움을 금하지 못한다.
그러나 나는 다른 한편에서 대통령의 언술에 대해서 “돌아버리겠다”라고 하는 생각이 하는 때도 많다. 더구나 최교수가 지적하듯이 “정치는 진정성이 아니라, 결과로 평가되는 것이다”라고 할 때 더욱 그러하다.
‘통치의 미덕’을 찾아보기 어려운-물론 보수언론의 왜곡을 전제하더라도-언술은 그 자체로 통치능력을 더욱 훼손하는 식으로 작동하였다. 대통령이 기존의 권위주의 틀에 얽매여서는 안 되겠지만, 그렇다고 대통령이 동사무소 주사 수준의 언술을 사용해서도 안 된다고 생각한다.
‘헤게모니의 정치’에 대한 고민이 부재
이 점에서 나는 참여정부 뿐만 아니라 진보진영 전체가 ‘정체성의 정치’만에 집중했지 ‘헤게모니의 정치’에 대한 고민이 없었다고 생각한다. 예컨대 이른바 조중동에 대립하는 자신의 ‘정체성’을 주장하고 드러내는 것이 민주정부 통치세력의 몫의 전부는 아니다.
어떤 의미에서 조중동의 영향 하에 있는 대중들, 심지어 조중동까지도 분화시켜 내면서 헤게모니적 구도 속에서 포용해내는 적극적인 전략도 필요했다고 생각한다. 행정수도 이전 문제, 검찰개혁 추동, 전시작전권 환수 등 많은 이슈에서 더욱 헤게모니적인 전략과 실천이 가능했다고 생각한다.
박정희가 ‘조국근대화’의 담론으로 진보세력의 일부까지도 초기에 포섭했던 것을 생각한다면, 통치세력으로서의 장점을 십분 활용하면서 보수세력의 일부까지도 포괄해내는 적극적인 헤게모니 전략을 행사할 수도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참여정부 주도세력은 독재 하에서 설정된 보수와 진보의 경계에 고착되어 있었지 이전까지의 보수와 진보의 경계를 ‘진보적으로’ 해체하면서 적극적으로 넘어서는 노력이 부족하였다. 경계가 확장되기보다, 인적 측면에서 본다면 참여정부의 집권세력은 그 기반이 점점 더 협소해져 갔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참여정부 집권세력 나아가 민주진보세력 일반의 사고 속에 ‘헤게모니의 정치’에 대한 고민이 없는 데서 기인한다. 반독재 운동이라는 것은 사실 시류에 영합하는 운동이 아니라 ‘옳은 것’이기 때문에 하는 운동이었다.
그리고 그 반대는 ‘옳지 않은 것’이었다. 어떤 의미에서 이러한 인식틀은 야당으로서나 사회운동의 영역에서는 미덕이지만 통치주체로서는 질곡이 되고 역작용을 일으키는 것일 수 있다.
이것은 참여정부 주체세력들이 ‘저항의 미덕’과 구별되는 ‘통치의 미덕’을 갖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나는 박정희 세력과 다른 방식의 ‘통치의 미덕’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예컨대 ‘원숙한 것’은 보수와 진보의 경계를 뛰어넘어 좋은 것이다.
중도자유주의적 정치에 대한 정치・사회적 보수의 저항과 비판
둘째의 실패요인을 보기로 하자. 이것은 참여정부 주체들이 자신들의 실패의 주된 요인으로 지적하는 것이다. 참여정부는 국민정부보다 더 보수와 진보의 대결, 좌우의 대립이 심화된 시기처럼 보여지고 있다. 참여정부의 집권주체들은 보수의 저항과 비판 때문에 일을 그르친다고 불평한다.
여기서 보수적 저항과 ‘참여정부의 실패’와의 관계를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정치사회적 보수 및 미디어 보수 등을 중심으로 하는 보수세력의 저항은 여러 가지 성격을 지니고 있다. 먼저 보수적 저항은 참여정부로 상징되는 중도자유주의세력의 개혁성마저도-때로 그것을 좌파정책이라고 비판하는 방식으로-굴절시키거나 무력화시키는 사회적 힘으로 작동하여 왔다.
예컨대 뉴라이트를 포함한 사회적 보수는 제도정치적 공간에서의-열린우리당이 추진하는-다수당적 개혁에 저항하면서 이를 비(非)제도정치적으로 무력화하고(예컨대 사학법 반대를 생각해보자. 최교수의 표현대로 사학법 반대는 민주주의적 의회질서 자체를 사회적 힘으로 부정하는 것이다), 일정한 수준 이상으로 진보하지 못하도록 하는 역할을 해 왔다.
미디어 보수는 뉴라이트 등의 보수적 저항과 참여정부의 중도자유주의적 개혁에 대한 급진진보적 저항을 적절히 부각시키면서 참여정부 정치에 대한 대중의 이반과 저항, 분노를 촉진하여 왔던 것이다.
최교수가 희망하는 바와 같이 제도정치로 사회적 갈등이 수렴되지 않은 것은, 역설적으로 바로 제도정치에 대한 이러한 보수적 저항을 중요 요인으로 한다. 참여정부가 제도정치 외부로 우회하고자 해서 문제가 생긴 것이 아니라-물론 전부는 아니지만-바로 제도정치를 무력화시키는 보수적 저항에 의해서 문제가 생긴 것이다.
보수적 비판의 진보적 잠재력
그러나 이러한 보수적인 사회적 저항은 일관되게 보수적인 효과만을 가져오고 있지 않다. 내 생각에는 긍정적인 효과도 가져오고 있다. 즉 우리 사회의 보수세력은 중도자유주의세력이 선도하고 있는 행정부 권력과 의회권력을 사회적 저항을 통해서 무력화하는 방식을 통해서, 최교수가 주목하는 제도정치와 사회(사회를 구성하는 대중들)의 괴리를 크게 만들었던 것이다.
참여정부와-중도리버럴 정치세력이 다수로서 존재하는-의회공간을 무력화하기 위한 보수적 저항이, 역설적으로 후술하는 바와 같이 신자유주의적 양극화에 의해 고통 받는 대중들이 제도정치에 적응하기 보다는 분노하고 그것으로부터 이반하도록 하는 효과를 가져왔다는 것이다. 이는 보수적 저항이 역설적인 진보적 잠재력을 갖고 있음을 의미한다.
개발독재 하에서 국민들이 권력에 순치되도록 역할해온 미디어 보수가 민주화가 가져온 자율을 만끽하면서 권력에 대해서 국민들이 저항하도록 만들고 그 결과로 대중이 중도자유주의적 정치에 만족하지 않고 이반하도록 하는 것은 더 높은 수준의 민주화를 위해서는 긍정적인 것이다.
사회진보는 사회적 갈등을 수렴하고 완충하는 제도정치의 기능을 뛰어넘어 대중들이 분노하고 그래서 ‘제도정치와 사회가 괴리’될 때 나타난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최교수가 이야기하는 제도정치로의 수렴은 사실 제도정치에 대한 대중들의 순응과 수용을 전제로 한다.
역설적으로 미디어 보수는 후술하는 신자유주의적 지구화와 결합된 민주정부의 개혁에 만족하지 않도록 (혹은 더욱 험악해진 현실에 분노하도록) 만드는데 기여한 것이다. 중도자유주의적 정치와 정부에 대한 보수적 저항은 역설적으로 중도자유주의 정치의 실패를 가속화하고 있고 그 일부가 보수화로도 나타나고 있지만 더 큰 틀에서 보면 제도정치 일반과 사회가 더욱 괴리되도록 만들고 있는 것이다(내가 최교수와 의견을 달리하는 것도 이 지점이다).
한나라당이 집권해도 제도정치에 대한 대중의 이반을 치유하기 위해서 더 전향적 대책을 내놓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을 조성하고 있다.
제도정치의 비(非)수렴은-최교수가 지적하는 것처럼-집권하고 있는 중도자유주의 세력의 의도의 결과가 아니라 중도자유주의적 정치에 만족하지 못하도록 하는 보수적 저항에 의해서 촉진되었다고 보아야 한다(물론 중도자유주의적 정치의 불안정은 급진적 저항 혹은 급진적 저항이 중도자유주의 정치에 대한 보수적 공격으로 ‘전유’된 것에 의해 촉진되고 있다).
이처럼 중도자유주의적 정치에 대한 사회대중들의 이반과 불만은, 한나라당으로 하여금 아파트 반값정책이나 등록금 반값정책과 같은 ‘반(反)시장적인’ 정책을 내놓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역설적 결과를 가져오고 있다.
(나는 이렇게 진보적인 정책을 내놓는 한 한나라당에 대해서 정치적 지지를 보낼 수 있다. 사실 이것이 최교수가 이야기하는 제도정치의 안정화와 정상화의 지름길이다. 사회의 요구에 근접하는 방식으로 보수정당이 변화할 때, 중도자유주의적 정치에 대한 보수의 사보타지가 철회될 때, 제도정치는 안정적인 것이 된다).
*조희연 교수의 원고는 두 차례에 걸쳐 실립니다-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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