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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진연구소

[안내]동아시아연구소 4월 국제컨퍼런스(07.04.20~21)


[안내]동아시아연구소 4월 국제컨퍼런스

동아시아 냉전문화의 역학: 1960~70년대 냉전기 동아시아 지역의 문화변동과 국민국가의 문화정치학

(Dynamics of Cold War Culture in East Asia: Cultural changes in the region during the Cold War in 1960s-70s and Cultural Politics of the Nation State )


일시 / 2007년 4월 20일(금) ~ 21(토)

장소 / 배재학술지원센터(서울 정동)

주최 / 성공회대학교 동아시아연구소, 민주주의와 사회운동연구소

후원 / 한국학술진흥재단


<< 컨퍼런스 소개 >>

성공회대학교 동아시아연구소는 2007년 4월 20~21일 양일간 "동아시아 냉전문화의 역학: 1960~70년대 냉전기 동아시아 지역의 변동과 국민국가 형성의 문화정치학" 이라는 주제로 컨퍼런스를 개최합니다.

현재 동아시아 국가간에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경제, 문화적 교류와 함께 나타나는 정치,사회적 갈등관계는 오랜시간 축적되어온 역사적 갈등의 흔적이기도 합니다. 이번 컨퍼런스는 동아시아 냉전유산을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하고, 냉전기 지역 역사를 향한 비판적 질문과 성찰을 통해 '국민’이 아닌 ‘지역인’으로서 사유하고 실천하는 탈냉전적 삶의 지평을 모색하는 의미 있는 자리가 될 것입니다.


<< 프로그램 >>

첫째날 ( 4월 20일 (금))

10:00-10:30

◈ 개회사

백원담 (성공회대학교)

10:30-13:00

◈ Panel 1. 동아시아와 ’민중’, ‘민족’, 그리고 ‘냉전’

Moderator:

윤영도 (성공회대학교)

발표자:

1. 1960-70년대 제3세계 민주화 운동의 열기와 ‘민족/민중’ 개념의 창안

가. 연구의 목적

이 글에서는 1960-70년대 동아시아 각국의 민간 차원의 민중민주운동 곧 제3세계 민주화운동의 대두와 확산, 그 지역적 연대고리의 형성과정과 대안적 경험의 교류 실상들에 대해 살펴보면서 각국의 국민국가형성과정에서의 국가주의적 민족/민중개념과는 다른 대안적 민족/민중개념의 문제를 논의한다. 그것은 일국적 과정이라기보다는 상호 삼투된다는 점에서 아시아에서의 대안적 혼종화의 문제를 토론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하는데, 이는 무엇보다도 새로운 아시아 지역정체성 혹은 지역주의 형성의 핵질을 규명하는 중요한 작업이 될 것이다.


나. 연구내용 및 방법

전후 세계질서의 재편이 달러·파운드체제의 붕괴라는 국제통화체제의 위기로 가중되면서, 제국질서 내부의 갈등은 구세계-미국 간의 구조적 불균형의 심화는 물론 서유럽국가들에서 일국내 경제적 수탈체계의 강화를 이룬다. 곧 서유럽국가에서 집중합병·합리화·노동강화라는 민중생존권의 위협을 기축으로 하고, 국가재정의 합리화·수익자부단을 기치로 한 재정수탈과 소득정책·가이드포스트정책을 표어로 한 임금억제정책을 보조축으로 민중경제의 파탄지경이 야기되는 것이다. 이로서 프랑스를 필두로 유럽사회에서 68혁명으로 표상되는 광범위한 대중스트라이크가 촉발하게 되고, 일본 또한 미국에의 종속구조로 인한 문제의 압박과 세계사적 모순의 전가로 반안보투쟁이 대중적으로 고양되게 된다. 그런데 이러한 세계적 위기상황은 막 근대적 국민국가를 형성해가는 제3세계 국가들에 있어서는 새로운 기회의 시간이었고, 그런 점에서 제1세계 와 제2세계와는 독자적인 제3세계의 선언과 연대움직임이 강화되는 시기이기도 하다. 70년대 말부터 80년대 초반까지 동아시아 사회와 특히 우리나라에서 민중민주운동의 격발은 새로운 민족주의와 주체형성과정, 그리고 새로운 변혁이념운동의 이념들을 촉성하게 만들어내면서 근대적 국민국가의 실질적 형성과 제3세계로서의 아시아 지역화의 가능성을 열어내기도 하였던 것이다.


여기에서는 아시아 국가들이 민중들의 주체적 역량의 성장에 힘입어 제국적 지형과 냉전체제의 이중적 억압질서 속에 환골탈태하는 과정에서 탈식민주의의 세계사적 대두를 담론적으로, 그리고 실제적인 반신식민주의투쟁과정 속에서 살펴본다. 특히 아시아가 스스로 제3세계화하는 과정, 새로운 민족주의의 대두와 민중주체형성과정에 주목하면서 당시 제기된 진보적 민족주의, 민중개념과 그것의 지역적 형성고리를 찾아내는데 주력할 것이다. ALLA와 신식민주의의 민족민중담론, 한국·중국·태국·말레이시아·베트남·필리핀 각국에서의 대안적 운동경험들과 일본에서의 전후 아시아주의성찰과 제3세계와의 연대움직임, 반안보투쟁의 경험들 모두를 아시아적 문화·사상적 유산으로 공유해가는 과정은 이후 아시아 지역화의 가능성, 새로운 아시아지역주의의 상상을 위한 중요한 고리가 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동시대 경제분야에서 일어나기 시작한 '아시아적 가치', 그리고 일본문화 주도의 아시아니즘과 다른 차별성을 갖는 점에 대해 분석함으로써, 대안적, 미래지향적 '아시아성'에 대해 전망하는 계기로 삼는다. 한편 이 연구는 스탈린 사후 소련과 중국의 불협화음 속에서 경제개혁의 실패와 새로운 사회주의의 길을 찾아나가기 위한 소련과 중국에서의 각기 다른 경로들 또한 주목한다. 그러한 경로는 현실사회주의권의 몰락으로 귀결되었지만, 그러나 소련의 경우 급격한 페레스트로이카로 인한 몰락 과정 이전의 자기전화를 위한 일련의 과정, 그리고 중국의 경우 문혁 이후 개혁개방의 기획을 만들어가는 과정 속에서 이루어지는 냉전체제의 몰락과 새로운 민족주의의 대두 및 내부 민주화투쟁의 실패의 지점을 통해 사회주의적 근대화경로를 문제삼음으로써 민족과 민중개념과 아시아정체성의 사회주의적 구성요소들을 획득하는데 역점을 둘 것이다


또한 당시 실제적인 대안적 운동경험과 문화자원의 교류의 실상들을 하나의 선색으로 이어내는 작업도 중요하게 진행할 것이다. 종속/민족/민중/노동/자본/모순/전형/당파성/민중연대성/리얼리즘 등의 각기 혹은 상호 번역과 공유를 통해 획득해간 개념들, 투쟁내용과 조직의 구성방식, 문화선전대·대자보·보고문학·벽시·판화·민중가요(노동가요,운동가요)·노가바·민중극·대동제 등 각국의 문화운동의 실상의 비교와 교류양상들, 즉 아시아에서 다원적인 문화교류와 절합지점들을 세세히 살펴보는 작업은 아시아적 정체성형성의 실제적 경로를 규명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백원담 (성공회대학교)

... 은 현재 성공회대 중어중국학과 교수이다. 동아시아문화공동체포럼 기획집행위원장, 중국 상해대 대학원 문화학과 해외교수, 미국 컬럼비아대학 방문교수, 『진보평론』『황해문화』 편집위원이기도 하다. 1996년 <중국 신시기 후현대문학비평론연구>로 연세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민중문화운동과 노동운동을 거쳐 지금은 한반도와 동아시아의 평화공존, 세계의 진정한 다원공생의 문화적 경로를 모색하고 있다. 주요논저로는 《동아시아의 문화선택, 한류》(2005), 《인문학의 위기》(1999), 《민중문화운동의 실천론》(1985), <동아시아에서 문화적 지역주의의 가능성>(2005), <중국에서 1980-1990년대 문화 전형의 문제-중국의 문화전형과 동아시아 역내 문화교통의 연관을 중심으로>(2005), <韓流の東アジア的可能性>(2005) <韩国的解放空间 (1945~1950) 与文学>(2006), <이병헌 팬 사이트를 통해서 본 동아시아 대중문화소통현상연구>(2004), <귀환 혹은 실감-최근 중국문학의 추향>(2003), <중국진보언론의 현주소>(2003), <和와 동아시아>(2003), <魯迅의 ‘宇’와 ‘宙>(2002), <모택동 연안문예강화의 재음미>(2001) <왜 동아시아인가?>(1999) 등이 있다.


2. 50-60년대 중국문학의 세 가지 규범과 민족 상상의 충돌

중국 대륙의 컨텍스트에서, 50-70년대 중국 문학은 한 가지 특정한 명칭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당대문학”이라는 것으로, 1919년에서 1949년 사이 “현대문학”을 넘어선, 사회주의의 성격을 갖춘 새로운 문학을 가리킨다. 그러나, 마오저뚱 시대의 사회주의 실천의 역사와 같이, 이런 종류의 “신문학”의 역사는 결코 통일적이지 않으며, 다른 규범의 충돌을 남기고 있다. 이러한 충돌들은 냉전 시기의 중국의 상황과 관련이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당대 문학 창시자들 사이의 생각의 어긋남과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당대문학”이라는 실천의 과정 중에 세 가지 규범이 존재하고 있다


첫 번째는, 1942년에 나온 <연안문예좌담회의 강화>로, 마오저뚱의 기본적인 문예관을 대표하였고, 1942년부터 1953년 사이 중국 문단의 주도적인 규범이 되었다. 이것의 기본적인 특징은 문예의 계급성 (“노동자, 농민, 군인의 문예”)과 민족성(“민족형식”, “중국 창작풍과 중국의 기개”)의 결합을 강조하는 것이었고, 문예의 대중성(“보편”)이 문예의 전문성(“제고”)보다 우위에 있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강화》는 곧 40년대 “연안의 길”이 “모스크바의 길”과 문예의 표현에 있어서 다르다는 것이다. 한 가지 보이는 예로, 1951년 “스탈린 문학상”을 수상한 중국 작가는 《강화》의 대표였던 자오슈리가 아니라, 연안이 그다지 중요하게 보지 않았고 “서구화”라는 특징을 가졌다고 비판되었던 딩링이었다는 것이다.


또 한 가지는 “사회주의 사실주의”이며, 이것은 소련의 기본적인 문예관이 중국에 영향을 미쳤다는 것을 대표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런 문예관은 1953년 한국전쟁이 끝난 후 형성된 아시아의 냉전 대치 국면 속에서 중국 문예의 기본적인 원칙이 되었으며, 또한 중소분쟁이 있었던 1958년까지 줄곧 계속되었다. 이 시기 동안 중국 문학의 국제화된 “사회주의 사실주의”에 대한 강조는, 민족화된 《강화》를 뛰어넘었다. 이것의 기본 특징은 “사회주의” 이념의 보편성을 강조하고, “민족성”이라는 제기방식을 약화시키는 것이었으며, 문예 편제의 정규화와 전문화(“제고”)가 문예의 대중운동(“보편”)보다 우위에 있음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사회주의 사실주의”라는 이 범주는, “사회주의”의 역사의 원경과 “사실주의”의 현실비판 사이에 동요하는 공간을 제공했으며, 1956-1957년대 지식인들의 민주화 요구였던 “백화문학”을 이루어냈다.


다른 한 가지 규범은 “30년대 문예전통”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으로, 1942-1966년 사이 줄곧 문예 창작을 주관했던 조우양의 기본 관념을 대표하면서, 또한 중소분쟁에서 문화대혁명 폭발 시기(1958-1965) 사이의 “중국의 특색”이라는 문예 실천을 대표하고 있기도 하다. 40년대 연안시기부터 시작하여, 조우양과 마오저뚱은 당대 문학이라는 이 부분을 어떻게 구상할까에 대해 분열을 겪게 되고, 이런 분열은 1958년 조우양이 전면적으로 문예계를 장악한 후에 직접 드러나게 되었다. 조우양과 마오저뚱의 기본적인 분열은, 문예의 국민-국가 내 지위 및 기능을 어떻게 볼 것인가에 있었다: 조우양이 문예를 보는 관점은 국가의 기구인 중요한 구성 부분으로 보는 것이었고, 이로써 문예의 기구화, 전문화 및 지식인의 엘리트적 지위를 강조하였다. 그러나 마오저뚱의 문예를 보는 관점은 시종, 국민-국가의 정치활동에 비판과 참여를 하는 중요 마당으로 보는 것이었고, 그러므로 문예의 비기구화, 보편화 및 대중화를 강조했다. 비록 조우양의 문예관과 소련의 “사회주의 사실주의” 정규화의 요구가 서로 비슷했지만, 1958년 중소 분쟁 중에 “중국의 특색”을 강조하는 분위기에서 조우양은 역시 중국 자신의 역사 속 “전통”을 찾기 시작하였고, 이것이 곧 그가 1930년대 중국 좌익 문예 역사에 대해 새로운 서술을 한 것이었다. 당성, 기구화, 전문화 및 지식인 엘리트 중심의 지위가 이런 규범의 주요 내용을 이루었다. 1966년 “문혁”이 폭발하고, 조우양의 문예 실험은 마오저뚱과 강청의 급진적 문예 실천에 의해 대체된다. 그러나 “문화대혁명”은 문예의 구상에 대해, 연안 시기 《강화》에 대해 상당한 정도로 새로운 제창과 재해석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본 논문은 세 종류의 문학 규범 충돌의 역사를 정리하고 분석함을 통해, 한 편으로 마오저뚱 시대 문예 실천 속의 복잡한 관계를 정리하고자 하며, 다른 한 편으로는 현대의 국족(국가와 민족) 상상의 두 가지 방향(즉 민족-국가와 국민-국가)을 시도해 보면서, 냉전국가체계 속에서 사회주의 중국의 국가 이론과 문화 정치의 새로운 가능성을 사고할 것을 제안한다. 이러한 규범들의 충돌 속에는 두 가지 핵심적 문제가 내포되어 있다. 하나는 냉전 국면 중에, 국제 공산주의운동전선 내 민족-국가간 충돌 및 그 민족주의의 문화적 형태가, 자본주의국가체계 내에서 형성된 민족 공동체 상상의 방식과는 구별된다는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사회주의 실천 속에서 국민-국가 상상의 형태 및 문예의 위치와 기능이, 일반적으로 시민사회가 이상적 모델로서 국민주체를 만들었던 방식과는 구별된다는 것이다. 이 두 가지는 우리가 오늘날 새롭게 냉전 시기 중국 문예 실천을 사고하는 현실의 참조점을 구성하고 있다.


허꾸이메이 (베이징대학교, 중국)

... 는 현재 베이징대학교 중문과 부교수이다. 1970년 후베이(湖北)성에서 태어났으며, 2000년 북경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주요 연구 영역은 20세기 중국문학사와 사상사, 당대 중국 문화연구이며, 『비평의 성장과 위기 - 90년대 문학 비평 연구』(1999), 『전환의 시대 - 40~50년대 작가 연구』(2003), 『인문학적 상상력 - 당대 중국 사상문화와 문학 문제』(2005) 등의 저서를 출판하였고, 이외 관련 분야에 관한 다수의 논문을 썼다.


3. 냉전봉쇄하의 민중문화

남북한의 경계인 DMZ를 여행하는 도중, 동아시아에서의 정치적 냉전 대치에는 결코 끝나지 않았구나 하는 강렬한 인상을 받았다. 그러나 또한 동시에 알게 모르게 전지구적 차원의 상품화 풍조가 가져온 현상, 즉 고난의 기억을 관광과 결합시키고 있는 현상에 대하여 깊은 우려를 느끼기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현상은 마찬가지로 광주(光州)에 우뚝 솟은 기념비에서도 고난과 여행 사이의 모순을 분명히 드러내 보여주고 있다. 중국 대륙에서의 “홍색여행(紅色旅游)”과 같은 사례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상대적으로 한국과 중국 대륙은, 형식상 냉전이 종결된 “포스트 냉전”의 시기에, 혁명 혹은 사회주의 이상을 숭고화하면서 또한 관광 유행에 영합하는 모순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타이완은 오랫동안 내재화된 “친미반공”의 상황 하에서, 이러한 배경을 완전히 말살시켜 버렸다. 타이베이에 있는 六張犁 공동묘지에는 50년대 백색테러 피해자의 유골들이 여전히 여기저기에 함께 묻혀 있는데, 이는 그 뚜렷한 사례이다.

분명 1950년대 이후의 냉전문화를 겪어오면서 타이완에 내재화된 신식민적 경향성은 아마도 다른 아시아 국가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한 과정은 대체로 반공, 반중의 맥락 속에서 그 명확한 원인을 찾아 볼 수 있을 것이다. 즉 타이완의 민족주의는 “본토화(本土化)”라는 시체를 빌려서 “친미반중”라는 혼을 불러왔던 셈이다.


따라서 민족주의의 배후에는 “본토화”의 문화선양이 있고, “본토화”의 배후에는 식민주의/제국에 대한 복종이 있는 것이다.

이러한 대중 추수의 본토주의적 민족문화 판본에 대응하여, 란보조우(藍博洲)가 전개하였던 “50년대 백색테러”에 대한 취재는 타이완 민중사 발굴의 중요성을 되돌아보게 한다. 이는 진보적인 역사적 정세가 어떻게 압살 당하였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더 나아가, “본토화”가 야기한 민족 융합 혹은 분열의 정치문화 조작과 관련하여서는, 반드시 원주민과 한족이 역사와 현실 속에서 억압과 피억압의 관계에 있었음을 봐야만 할 것이다. 관샤오롱(關曉榮)이 란위(蘭嶼)에서 전개한 핵폐기물 반대 보도는 냉전/계엄 체제 하에서 타이완 경제가 약소민족인 원주민에 대한 착취 속에서 성장한 것임을 폭로하였다.


마지막으로 민중 희극이 어떻게 지역사회 극장의 새로운 발전을 통해 민중의 문화권(cultural empowerment)을 개발할 것인가, 또한 동아시아 교류를 통해 동아시아 심리적 지도상의 냉전장벽을 뛰어넘을 것인가 하는 문제가 있다.


종챠오 (연극인, 타이완)

... 는 1956년생으로 타이완 먀오리(苗栗) 객가(客家)인이다. 1970년대 중엽에 시를 쓰기 시작하여, 1980년대에는 인간잡지에 보도 문장을 썼으며, 1984년 중국 문화대학(Chinese cultural university, Taipei)에서 연극 석사 학위를 받았다. 1990년대에는 아시아 제 3세계 국가들로부터 민중극 이론과 기술을 받아들여 민중 극장을 설립하였으며, 이와 함께 시작(詩作)의 활동 역시 재개하였다. 1997년 차스(差事)극단을 설립하여 시적 정취를 극장으로 옮겨오고자 하는 실천을 진행하고 있으며, 그러는 가운데 천막극(帳篷劇)에서 마술적 리얼리즘 민중극 공연을 발전시켰다. 최근에는 상상과 현실을 천막극과 지역 극장에 실현시키는 문제, 민중 극장에 관한 이론과 실천의 측면에서 아시아 협력을 심화시키는 문제 등에 관하여 관심을 갖고 있다.

토론자:

임춘성 (목포대학교)

조희연 (성공회대학교)

14:00-15:30

◈ Panel 2 : 1960~70년대 아시아에서의 대중문화의 변형과 냉전의 정치학

사회자:

이선이 (성공회대학교)

발표자:

1.문화냉전과 지브리 스튜디오(Studio Ghibli)의 탄생

냉전 이후 시기, 일본의 애니메이션은 서양뿐만 아니라 동아시아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고 있고, 그 가운데 블록버스터 애니메이션 스튜디오인 지브리 스튜디오(Studio Ghibli)는 특별한 지위를 점하고 있다. 이 논문에서는 2차 대전 이후 미국에 대한 역사적 기억과 관련하여, 그리고 냉전기 미국의 문화정치와의 관계에 특별히 주목하면서, 당대 일본 애니메이션 문화를 검토할 것이다. 이를 통해 전후 동아시아에서 냉전기 동안 디즈니(Disney)와 FBI 사이의 관계, 그리고 신니혼도가샤(新日本ドガシャ)와 GHQ(연합국군최고사령부) 사이의 관계들을 부각시킬 것이다.


시미즈 토모코 (츠쿠바대학교, 일본)

... 는 일본 쓰쿠바대학교의 강사이다. 영국 버밍햄대학에서 문화연구와 사회학으로 석사학위를 받은 뒤 쓰쿠바대학교에서 문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녀의 연구 관심들은 비교문학, 미디어 그리고 문화이론 등이다.


2. 냉전 시대 타이완의 텔레비전 산업

이 논문에서 나는 미국과 일본이 타이완의 텔레비전산업의 탄생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를 논의 할 것이다. 타이완 최초의 텔레비전 방송국은 1962년 일본 지원 하에 설립되었다. 당시 타이완의 문화정책은 일본어를 금지하고 식민 문화를 제거하려는 것이었지만, 타이완의 전자 산업은 여러 부분에서 일본의 기술과 자본에 의존했다. 이런 긴장 상태는, 타이완 정부가 개발 담론에서 공공연하게 친미적 입장을 취했음에도 불구하고, 수십 년 동안 지속되었고, 일본은 그 개발 과정에서 무언의 세력이었다. 이 논문은 어떻게 하여 아메리카의 라이브스타일이 이상적 모델로 상상되고, 일본의 실재는 공적으로(in public) 억제되었는지를 고찰할 것이다. 나아가 텔레비전이 모더니티의 대상이자 반공주의의 핵심적 수단으로 부각되어지는지에 대해서도 역시 고찰할 것이다.


코위펀 (국립정치대학교, 타이완)

... 은 미국 위스콘신 매디슨 대학교 커뮤니케이션 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녀는 현재 타이완 정치대학교 (National Chengchi University: 國立政治大學校)의 조교수이고, 텔레비전 대중문화와 문화정치(학)에 대해 연구하고 있다.


3. 공공 음악공간과 ‘청년문화/퇴폐문화’의 정치학: 1970년대 한국과 태국의 경우

이 논문은 1970년대 남한과 태국 두 아시아 나라들의 대중음악과 ‘청년문화’에 대한 연구이다. 두 나라는 정치적이고 저항적인 음악문화를 가졌다는 점에서 공통적인데, 이를 위해 서양(미국)에서 수입되었지만 청년문화(대학생문화)와 접속된 ‘포크’ 음악에 초점을 두고 있다. 즉, 음악형식 및 이와 관련된 문화실천에 관한 이데올로기적 효과, 제도, 문화적 담론에 대해 다룬다. 이를 통해 국내외 냉전의 정치학이 수입된 음악문화가 토착화로 변환되는 데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를 분석하고, 나아가 냉전의 고조기에 아시아 각 지역의 문화적 형성 및 변환에 냉전의 정치학이 행사했던 복잡한 효과들을 조명할 것이다.


신현준 (성공회대학교)

... 은 성공회대학교 동아시아연구소의 연구교수이다. 서울대학교 경제학과에서 지구화 시대의 한국음악산업에 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뒤 청년 정체성, 대중문화, 문화산업 및 문화정책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해 왔다. 학술 경력 이외에 그는 대중음악 및 대중문화 전반에 관해 비평가/저널리스트로 활동해 왔다. 그의 저서로는 [글로벌, 로컬 한국의 음악산업](2001), [한국 팝의 고고학](2005) 등이 있다.


뷔리야 사왕초트(와타나살라 문화연구소, 태국)

... 는 태국 논타부리에 위치한 와타나살라 문화연구 센터의 공동 설립자이자 연구자이고, 방콕의 크리크 대학교(Krirk University)의 인문학부의 시간강사이다. 그는 1988년 람클람헹 대학교(Ramklamheng University)에서 경제학으로 첫 학위를 받은 뒤 1990년대는 오스트레일라의 퀸스랜드 대학교에서 학제간 연구로 전문 커뮤니케이션 학위 및 석사학위를 받았다. 석사학위를 받기 전부터 그는 태국의 두 종류 대중음악 잡지의 편집장이었는데, 하나는 태국 최초의 대안적 음악잡지인 분텡 크하드(Buntueng Khad)이고, 다른 하나는 태국에서 가장 오래된 음악잡지인 뮤직 익스프레스(Music Express)다. 연구자로서 그는 방콕의 하위문화의 주체들에 깊이 접촉하고 있고, 이는 상이한 종류의 현상을 통해 다양한 형태의 정체성을 구성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현재 그는 타이의 학술 서적, 대중잡지, 웹사이트 등 여러 곳에 글을 기고하고 있다.

토론자:

이상길 (연세대학교)

유선영 (한국언론재단)

17:30-18:00

◈ 원탁토론(첫째날)

둘째날 ( 4월 21일(토) )

10:00-13:00

◈ Panel 3. 냉전기 동아시아 지정학: 경험 혹은 상상으로서의 동아시아

사회자:

김예림 (성공회대학교)

발표자:

1. 베트남 전쟁과 한미 양국 정부의 아시아 인식

박태균 (서울대학교)

2. 1960~70년대 일본의 반전운동과 “아시아”를 향한 시선의 등장

이 논문에서는 ‘베헤이렌(베트남에 평화를! 시민연합)’의 활동가이자 이후 독자적인 아시아 연구 영역을 개척한 평론가 쓰루미 요시유키 (鶴見良行)의 궤적을 중심으로, 1960-70년대 일본의 베트남 반전운동 속에서 아시아 인식이 새롭게 출현하는 과정을 검토할 것이다. 베트남 반전운동에 참여한 쓰루미 요시유키는 국가에 의해 전쟁이 지지되는 구조를 해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70년대 초에는 제3세계 사회운동 정보센터 “PARC”를 무토 이치요(武藤一羊)와 함께 결성했다. 1980년대에 접어들면서 직접적인 정치적 운동으로부터 거리를 두게 되지만, 이 시기 동남아시아라는 도서(島嶼) 사회에 대한 현지답사를 계속해 나간다. 그는 군사 ・자본・국가 권력에 의해 구조화된 <대륙 아시아>가 아니라 사람들이 혼주하고 이동하고 국가의 경계를 뛰어넘는 <해양 아시아>에 시점을 고정시켜, ‘제국’, ‘국민국가’ 의 통제를 받지 않는 위치에서 ‘제국’, ‘국민국가’를 상대화시키는 인식틀을 탐색했다.


미치바 치카노부 (와세대대학교, 일본)

... 는 일본의 사회과학과 사회운동사를 전공했으며 현재 와세대 대학, 니혼 대학 등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점령과 평화-경험으로서의 ‘전후’>>(세이도샤, 2005), <<사회운동의 사회학>>(공저, 유히카쿠, 2004), <<전후 일본 사상선집 50>>(공저, 헤이본샤, 2006) 등의 책을 집필했다. 그 외 <<1960-70년대 주민운동>>(5권, 소우도샤, 2005)과 <<전후 일본의 주민 운동 자료 및 기록>>(10권, 수이렌샤, 현재 출판및편집 중) 시리즈를 재발행하는 편집 멤버로 활동하고 있으며, 일본의 고도 성장기의 자료들을 복각하는 작업에 참여하고 있다.


3. 홍콩에서 문화냉전의 영향과 식민권력의 토착화

중국 민족주의가 냉전이라는 직접적인 이유가 아닌 국민당과 공산당 사이의 지속된 갈등으로 인해 분열되고(이 갈등은 1920년대 중반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양 진영 사이의 경쟁 관계가 영국 식민주의에 의해 걸러지면서, 홍콩은 냉전 대결의 매우 특이한 케이스가 된다. 이 논문은 홍콩에서 식민주의와 중국민족주의가 어떤 관계를 갖고 있었는가를 탐구함으로써 60-70년대 문화 냉전의 영향을 연구하고자 한다. 즉 문화냉전이 '해외의 중국'이라는 민족주의적 상상을 형성하게 되는 과정을 살펴볼 것이다. '해외의 중국'은 타이완해협의 어느 한 쪽으로 축소될 수 없는, 타협적인 정치-문화 공간이라 개념화될 수 있다. 나는 식민주의가 낳은 이 잠정적이고 일시적이며 상상적인 공간이 – 냉전기를 거치면서 – 현재 홍콩의 정체성이라 알려진 것들에 그 형태를 부여했다고 생각한다. 이 보고서는, 지난 20년간 이데올로기적 풍경이 어떻게 변화했는가를 검토하면서 식민권력이 어떤 식으로 홍콩에 ‘토착화’ 되었는지를 분석할 것이다. 식민권력의 토착화가 미친 영향은 탈식민화된 홍콩에 여전히 나타나고 있다.


로윙상(링난대학교, 홍콩)

... 은 링난 대학의 문화학부 조교수이다. 홍콩중문대학에서 사회학으로 학사와 석사 학위를 받고, 2002년 시드니의 테크놀로지 대학에서 문화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의 연구분야는 식민주의의 역사문화학, 비교사회사고, 홍콩문화형성에서부터 문화학과 사회학 이론에까지 뻗어 있다. 그는 현재 홍콩대학출판부에서 출간 예정인 <<식민지의 홍콩 중국인 만들기>>를 집필 중이다. 또한 <<포지션>>, <<동아시아문화비평>>, <<흔적: 문화 이론과 번역의 다중언어 시리즈>>, <<인터-아시아 문화학>> 등과 같은 저널에 논문을 투고하기도 하였다. 또한 그는 문화학 선집과 중국어로 쓰인 번역서의 편집자이기도 하다.

토론자:

권혁태 (성공회대학교)

박은홍 (성공회대학교)

14:00-17:30

◈ Panel 4. '조국 근대화', 국민의 통합 그리고 균열

사회자:

박자영 (협성대학교)

발표자:

1. 냉전시기 영화, 그리고 구성되는 근대적 국민

이 글은 냉전이 문화적으로 일상 속에 내재화되는 복잡한 과정의 미디어적 경치를 소묘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출발했다. 따라서 이 글은 우선, 냉전국면에서 당시 국가권력이 대중을 ‘국민’으로 호명한 방식과 과정을 탐구하고자 한다. 국민으로 호명하는 방식을 결과가 아닌 과정에 초점을 맞추어 보고자 하는 이유는 대중이 국가권력에게 아무런 저항없이 호명되어 주체를 형성했다는 이데올로기 매몰적인 주장에서 벗어나 현실 설명력을 높이고자 하기 때문이다. 국가권력이 대중을 국민으로 동원하기 위해 사용하는 전략은 텍스트적인 측면과 컨텍스트적인 측면에서 동시에 수행된다. 그리고, 냉전국면이 특수한 정치 경제 사회적인 맥락과 접합하는 과정에서 어떤 특수한 문화로 형성되는지를 아시아 내의 한국과 필리핀을 비교하면서 살펴보고자 한다. 이 글은 60년대 대중문화의 핵심이자 지배 이데올로기의 중요한 전파 도구였고 70년대 중반에 텔레비전에게 그 지위를 넘겨주기까지 중요한 역할을 한 영화에 주목한다.


구체적으로 이 글에서 연구하고자 하는 문제는, 박정희 정권은 근대화 기획을 수행하기 위해서 영화에서 바람직한 모습으로 재현되는 한국사회, 한국민의 모습은 어떠한가? 그 방식은 어떠한가? 이 방식에 대한 설명은 영화인들이 통치 주체와 연합하거나 저항하는 당시의 현상을 설명하고 있는가? 박정희 정권이 영화인들 및 영화 관객과의 관계 속에서 채택한 영화정책과 제도의 특성은 무엇이며 어떤 과정을 거쳤는가?이다.


염찬희 (성공회대학교)

... 는 현재 성공회대학교 동아시아연구소 연구교수로 있으며, 강원대, 성공회대, 충남대, 상지대, 서울대 등에서 <현대사회와 매스미디어>, <영상의 이해>, <영화론> 등을 강의해오고 있다. 2004년에 서울대 언론정보학과에서 "시장개방 이후 한국영화의 변화 과정과 특성에 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가장 최근의 글 작업은 한국영화 의무상영일수(스크린쿼터)제도의 담론 정치, 1950년대 한국영화의 작동방식과 사회적 맥락의 관계성에 대한 연구였고, 현재의 주요 관심은 한국영화 문화와 산업에 기입된 세계화/지역화 양상들, 해외합작영화와 드라마와 민족주의 담론의 문제, 박정희 정권의 한국영화와 냉전문화 등에 있다.


2.필리핀의 냉전 영화정책

냉전 시대 필리핀에서는 주로 미국의 정치 담론에서 발생하는 징후들이 과하게 나타났다. 반공적 마녀사냥, 심리전 폭동진압 전술들, 가부장적 그리고 군국주의적 원칙들에 대한 칭송, 다름에 대한 폭력적 억압. 이러한 것들은 2차 세계대전 이후 필리핀의 독립 승인과 함께 시작된 정치적 안정 및 경제적 번영 시기에 나타난 취약점들이다.


그러나 냉전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는 이 기간은 필리핀 경제 발전의 전환점인 동시에 소위 대통령, 후에 독재자가 된 마르코스가 미국과 특별한 관계를 가진 시기였다. 1972년 계엄령 선포와 함께 마르코스는 전통적인 과두제를 사회주의 국가 통제와 닮은 어떤 것으로 대체하려고했으나, 편파적 인맥을 통한 부패(cronyist corruption), 그리고 수십억 달러의 외국 차관을 남용하기 때문에 오히려 국가의 발전적 흐름이 뒤집어졌을 뿐이었다. 부의 효율적인 몰수와 국외추방을 보장하기 위하여 계엄당국은 지역 미디어를 광범위하고도 엄중하게 검열하였다. 재미있게도, 끊임없는 억압적인 제도 아래에서 마르코스에 의해 면제된 유일한 매체는 오직 영화였다. 문화 정책 원칙들을 이용해서, 이 논문은 마르코스가 필리핀 영화들에 부여한 편애적 지위를 어떻게 해석할지를 살펴 볼 것이고, 필리핀 영화에 대한 마르코스의 전망을 수행하기 위해 만든 제도인 필리핀 실험 영화(Experimental Cinema of the Philippines)의 역동성을 조사할 것이다.

조엘 데이비드 (필리핀대학)

... 는 필리핀 대학(UP)에서 조교수로 재직중이다. 그는 필리핀 최초의 영화학 학사이다. 그는 언론학과도 수료했으며, 대학으로부터는 최우수학생상을 받았다. 풀브라이트 장학생으로 뉴욕대학영화연구소에서 석 박사학위를 취득한 후 필리핀대학 영화연구소의 설립 소장이 되었다. 필리핀 최초로 영화학 석사 과정을 개설하였다. 저서로는 『The National Pastime』, 『Wages of Cinema』와 서적부분 마닐라비평가상을 수상한 『Fields of Vision』등이 있다. 2004년부터 현재까지 한국 한림대학에 방문교수로 있는 중이다.

3. 1960~70년대 동아시아 지상파 텔레비전의 '공공'이데올로기에 관한 연구

1960년대 이후 동아시아 미디어는 냉전의 도관에서 새로운 국민 형성의 메커니즘으로 확대, 재편된다고 할 수 있다. 특히 1960년대 이후 텔레비전 방송의 도입과 일상화는 전파미디어의 영향력을 극대화하였고, 일상적 삶의 기호로 자리 잡게 된다.


따라서 1960년대 이후 동아시아 국가에서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지상파 텔레비전 방송의 공공 이데올로기의 형성과 작동논리, 영향관계를 살펴보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특히 동아시아 3국의 지상파 텔레비전이 사회적 시스템으로 정착하는 과정이 상이함에도 1960년대 이후 그 작동의 논리와 사회적 기능이 놀라울 정도로 유사했다는 점이다. 특히 지상파 텔레비전 방송이 강하게 작용하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 이후라고 볼 수 있다. 대체로 동아시아 3국에서 텔레비전 보급대수 기준으로 볼 때, 텔레비전이 일상적 미디어로 자리 잡는 것은 1970년대 초중반이다. 한국, 일본, 중국에서 지상파 텔레비전 방송이 일상적 미디어가 된 것은 국가의 강력한 ‘후견주의’의 산물이라고 볼 수 있다. 즉, 정치체제의 성격과 무관하게 당시 세 나라의 정치권력은 근대화와 사회발전, 사회통합을 위해 미디어를 적극 동원해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각기 다른 사회적 환경이 조성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공통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미디어의 동원 방식을 살펴보기 위해 1960년대~1970년대 동아시아, 특히 일본과 한국의 지상파 텔레비전 사회사, 정책사를 비교 검토하고자 한다. 구체적 검토의 대상은 정치권력의 성격변화와 텔레비전 정책, 자본 및 산업의 발전과 지상파 텔레비전 시장구조, 조국근대화 이데올로기에 대한 지상파 텔레비전의 내면화 과정, 국가 개입의 대표적 방식으로서 공공이데올로기를 내면화한 텔레비전 프로그램 사례, 미국의 냉전이데올로기에 대한 수용 혹은 비판 사례 등을 중심으로 살펴볼 것이다.


이종님 (성공회대학교)

... 은 성공회대 동아시아연구소의 연구교수이다. 그녀는 중앙대학교 매스커뮤니케이션 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녀는 지구화시대에서 미디어 컨텐츠와 한국 미디어 산업의 문화적 다양성에 관해 연구한다. 그의 관심분야는 미디어, 영화 산업 그리고 문화 정책을 통한 사회를 포함한다.

4. 주변부 스포츠 이벤트의 탄생과 국가나르시시즘 -1970년대 아시아 국제 축구대회의 근대표상

이 논문은 ‘박스컵’, ‘메르데카컵’, ‘킹스컵’과 같은 1970년대 국제 축구대회들이 국가 지배의 정당성을 확보하게 위한 대중동원에 어떤 이데올로기적이고 문화적인 영향을 행사했는지를 검토하고자 한다. 주지하듯이, 1955년 메르데카컵으로 시작하여 킹스컵, 박스컵으로 이어지는 아시아 축구 이벤트들은 1970년대 전성기를 구가하였다. 이 세 개의 축구 이벤트들은 아시아 축구발전에 경쟁적이면서도 동시에 상호 협조적인 관계를 유지해왔으며, 제 3세계 아시아 권역주의를 위한 내적인 연대를 형성하는 데 기여하였다. 흥미롭게도 이러한 내적인 연대는 정권의 정당화와 대중의 동의하는 공통의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다른 말로 하자면, 3대 축구 이벤트는 유럽의 축구 리그에 비해 형편없는 수준에도 불구하고, 경쟁 국가들을 이기기 위해 최선을 다했는데, 이는 출전한 다른 아시아 국가들에 대한 상징적이고 우월한 지위를 획득하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경쟁 관계가 대중들을 축구 이벤트에 흡수하려는 국가 나르시시즘과 교차되면서, 아시아 국제 축구대회는 1970년대 독재와 산업근대화의 정당성을 위한 국가장치로서 기능하였다.


특히 1971년에 시작한 ‘박스컵’은 1976년 박대통령국제축구대회로 명칭을 변경하였고, 1980년에는 대통령배국제축구대회로 재변경되었는데, 이는 국내에서 개최된 유일한 국제 스포츠 이벤트였다. 외국 선수들의 경기를 볼 수 있는 기회가 극히 제한되었던 시절, 박스컵은 당시 동대문구장에 구름 관중들을 몰고 다녔으며, 텔레비전으로 중계되던 경기들도 상당한 시청율을 기록하였다. 당시 박스컵은 1966년 북한이 영국월드컵에서 이탈리아를 물리치고 8강에 오른 것과, 1968년 멕시코시티 월드컵에서 일본이 동메달을 차지한 것에 자극을 받아 어려운 경제사정에도 불구하고 개최된 것으로 한국 축구 자체의 발전을 위한 이벤트 뿐아니라 동아시아 냉전의 정치적 환경을 반영한 대회라 할 수 있다. 축구 경기장에 입장한 관중들이나 텔레비전으로 경기를 시청한 시민들은 한국의 축구가 매 경기마다 월등한 기량으로 승리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한국의 축구 역량을 국가적 역량으로 동일시하곤 했다. 또한 1976년부터 박스컵이 아시아 국가팀을 초청하는데서 벗어나 남미의 프로 클럽팀을 초청하는 국제화의 면모를 보여주었는데, 이는 한국의 산업 근대화의 국제화 시기와 맞아떨어진다.


따라서 박스컵은 대중들이 산업근대화와 그로 인해 발생되는 필연적인 폭력을 동의하게끔 만드는 가상적인 장으로 대중을 동원시키는 데 있어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 논문은 박스컵과 다른 아시아 국제 축구대회와의 상관관계를 검토하면서 정치적 정당성과 경제적 욕망을 위한 근대적 국가 프로젝트의 허상을 드러내고자 한다.


이동연 (한국예술종합학교)

... 은 한국예술종합학교 한국전통예술이론과 교수이다. 그는 중앙대학교 영문학과에서 “포스트모던 문학이론에 대한 메타비평의 문제”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그는 문화연구와 문화이론에 대해 많은 저술 작업을 해왔다. 대표작들에는 『문화연구의 새로운 토픽들』(1997), 『대중문화연구와 문화 비평』(2002), 『문화부족의 사회: 히피에서 폐인까지』(2005), 『아시아문화연구를 상상하기』(2006) 등이 있다.

토론자:

김창남 (성공회대학교)

정준영(한국방송통신대학교)

17:30-18:00

◈ 원탁토론 (둘째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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