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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연 "한국 사회과학의 정립을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하는 고민"

다음은 조희연선생님이 아래 신문기사에도 나온 [급진민주주의연구모임 데모스]의 카페(http://cafe.naver.com/radicaldemocracy )에 쓰신 글입니다.

연구모임 구성원들과 함께 문제의식을 공유하고자 쓴 글이므로 논문식으로 정리된 글이 아님을 미리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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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회과학의 정립을 향한 고민 (조희연)

제가 요즘 고민하고 있는 문제, ‘한국’사회과학은 어떻게 가능한가하는 문제입니다. 가장 핵심적인 문제는--성공회대의 학풍, 조희연을 포함하여--한국에서 ‘한국’사회과학이 부재한 것은 한국사회 현실을 다루는데, 서구적·미국적 개념이 출발점이자 종착점이 되는 작업방식 그 자체에서 발생한다고 생각한다. 즉 서구의 특정개념--근대성을 구성하는 시민사회나 민주주의 등까지도 포함하여--여러 개념들을 ‘보편개념’으로 상정하고 그것을 ‘적용’하는 식으로 진행되는 한국사회과학의 현행 접근방법을 말한다. 이 점은 “한국인문사회과학의 서구중심성을 복하기 위해 우리가 무엇을 반성해야 하는가“라는 필자의 최근 고민과 관련이 되어 있다. 필자는 한국의 탈식민주의자들은, 탈식민주의적 사고를 하는 것이 아니라 서구의 탈식민주의 이론을 소개하고 있는 것으로 탈식민주의를 행한다. 그리고 한국의 탈식민주의는 남한의 반미주의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 이것이 한국 탈식민주의자들의 현실이다.


이는 이미 동아시아 중에서 상당히 특징적으로 한국에서 친서구주의·친미주의가 성공적으로 착근하여, 인문사회과학의 분류체계 자체가 완전히 미국식으로 구조화되어 있고, 개념 및 방법론에 이르기까지 미국식을 지배적인 것으로 하여 진행되고 있는 현실의 반영이기는 하다. 신자유주의적 지구화의 상황에서 이 점을 더욱 강화되고 있다. 경제학의 경우 한국경제학과 미국경제학의 차이는 없다. 이미 수도권의 유수대학의 경제학과에는 ‘한국’경제학은 거의 없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저는 한국사회과학의 가능성은 서구적 이론과 개념으로 포착되지 않는 한국적 현실의 특수성과 그것의 일반성을 찾아내는 데서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이것을 저는 ‘우리안의 보편성(조희연, 2006)’이라고 하는 개념으로 제시한 바 있다. 예컨대 촛불시위를 분석한다고 해보자. 한때 촛불시위 대중의 특성을 ‘다중’이라는 개념을 조망하는 논의가 주목을 받았다. 필자도 다중이나 집단지성 등과 같은 개념이 촛불시위의 새로운 측면을 드러내어준다고 생각하고 사실 저도 대학원 수업의 중요한 강의내용으로 설정하고 배우고 있다. 그러나 촛불운동 참여자들에는 다중이라는 개념 만으로 포착되지 않는 한국적 복합성이 있다. 그러나 그 복합성은 잔여범주가 된다. 서구적 개념에서 우리가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지만 그 개념은 특정한 문맥적 개념이고 그것의 함의가 일정하게 고정화되어 있다. 이런 점에서 특정한 개념으로 촛불시위를 접근하는 순간, 이미 ‘결론’은 정해져 있다. 촛불시위의 한국적 특성을 독창적으로 탐색하여 그것을 일반화하는 경로는 없다. 필자는 다양한 서구적 개념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촛불시위를 포함한--고유한 복합성을 갖는--한국의 현상이 출발점이 되어야 하며 그에 대한 설명이 ‘누적적으로’ 풍부화되는 방식으로 논쟁과 논의가 전개되어야 한국사회과학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많은 경우--좌우파를 가릴 것 없이--서구적 개념을 적용하는 관점에서 접근한다. 이것이 좌파, 맑스주의자도 정확히 동일하다. 이런 점에서 ‘한국’사회과학의 건설에 좌파가 우파에 비해 앞서 있지 않다. 어떤 의미에서 좌파는 맑스주의의 정치경제학의 개념과 이론의 ‘보편성’을 더욱 강력하게 신봉하는 입장에서 현실을 접근한다. 평균이윤율이나 자본순환을 분석하는데, 영국과 한국의 ‘질적 차이’가 이론화되지 않는다. ‘적용’의 문제가 된다.


더구나 이미 한국이 서구 혹은 미국의 학문 공동체의 ‘변방’으로 위치해 있고 ‘중심’의 이론적 변화에 ‘연동’되어 있기 때문에, 그 개념들은 또한 계속 변화한다. 보편성은 언제나 서구에서 발원하기 때문이다. 제가 지적하고자 하는 것은 그러한 개념이나 이론들을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그 개념이나 이론 자체가 한국현실 보다 먼저 설정되어 있고 결론을 인도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현실을 가지고 논쟁해야 하는데, 서구 개념 논쟁이 되는 경우가 많다. 필자도 사실 이러한 비판으로 자유롭지 않은데, 이미 탈맥락화된 방식으로 서구의 개념이나 이론의 흐름을 준거해야 학문적 권위를 인정받는 방식으로 고착화되어 있다. 제가 대만에 있으면서 대만과 중국의 학자에게서 약간의 차이를 발견한다면 이론 점이다. 대만은 물론 한국과 같이 미국중심주의가 강하다. 그러나 예컨대 ‘손문학’이 하나의 분과학으로 존재한다.


여기서 필자는 유학파와 국내파는 차이가 없다. 유학한 연구자는 외국의 학문적 흐름의 속에 있되, 한국의 특수성을 일반화하여 외국의 학문적 흐름 그 자체를 창조적으로 넘어서야 한다. 그런 점에서 장하준 같은 경우는--그의 일정한 ‘국가주의’적 요소에 불만이지만--좋은 전범이다. ‘적용’이 아니라, 외국이론을 상대화하고 외국 이론의 흐름 속에서도 한국의 창조적으로 ‘보편화’되어 투입되어야 한다. 문제는 국내에서 연구하는 연구자이다. 정작 ‘한국’사회를 연구하려고 하면, 이러한 누적된 축적의 전통과 한국사회과학의 전통이 없기 때문에, 외국 연구자와 한국사회연구에서 특별한 장점이 없다. 한국사회과학의 종속성과는 별개로, 국내연구자가--최소한 영어라도 잘하는--외국유학 연구자와 경쟁에서 경쟁력을 못갖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도 있다. 국내파 연구자는 자기 현실에서 더많이 몸담고 있기 때문에, 외국유학 연구자 보다 자기 사회 연구에 장점과 선진성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정작 국내연구자는 더더욱 서구종속적이므로, 장점이 없는 셈이 된다. 아예 국사학이나 국문학처럼 국내 ‘소재’를 연구하는 경우는 일정한 예외가 있다.


우리가 한국사회과학을 정초하고자 한다면 한국의 현실을 출발점으로 하고, 다양한 서구적 개념과 이론이 한국현실과 관련하여 도구적으로 논의되는 방식으로 전환되어야한다. 그렇지 않는 한, 이러한 식민주의적 지식생산의 구조는 변화할 수 없다. 서구의 개념들이 한국현실을 분석하는 다양한 ‘도구적 준거’가 되고, 우리의 현실을 대상으로 다양한 논의들이 전개하고, 그 논의들을 서구 개념을 전거로 한 비판과 반비판이 아니라 우리 현실의 특정 측면을 자기 준거로 하는 비판과 반비판이 확산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럴 때 한국적 특수성에서 출발한 일반적 개념과 이론도 나타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는 단순히 지적인 문제만이 아니며, 집단적 작업방식의 변화가 있어야 한다. 즉 한국의 현실을 공통분모로 하는 ‘상호인용’ 공동체가 존재해야 한다. 일종의 ‘준거공동체’의 전환이다. 사실 이런 점에서 보수적 학계는 말할 것도 없고, 비판사회과학진영도 예외는 아니다. 언제나 권위를 인정받는 준거는 서구 학계가 된다. 물론 이는 어떤 의미에서 ‘자연스런’ 현상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우리들이 서구 학계를 ‘일차적 준거’로 하기 때문에, 비판하거나 재론하는 사람도 한국학자라는 ‘이차적 준거’ 보다는 그 학자들이 근거하는 ‘일차적 준거’를 기준으로 논의를 전개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식민주의적인 지적·학문적 악순환이 발생하게 된다. 한국의 사회와 운동에 작동하는 식민주의, 냉전, 개발독재, 민주화, 정보화의 특수한 요인들은 일반화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심지어 서구 중심적인 다른 작업을 비판하기 위해서, 우리는 다시 또 서구의 개념을 원용한다. 그나마 식민주의, 남반부, 세계체제 내의 권력관계를 분석하기 위해, 혹은 한국사회의 다수자-소수자 간의 권력관계를 비판하기 위해서도 우리는 또 외국의 학자를 인용한다. 필자는 사실 이런 점에서 인식론적 전환과 준거공동체의 집단적 전환이 있어야 서구중심주의를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점에서 필자는 오히려 서구중심적 사회과학을 벗어나기 위한 작은 시도로서 우리 사회를 놓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박정희시대, 민주화 시대, 김동춘 선생이 하고 있는 해방공간, 한국전쟁, 현재의 한국사회에 대한 연구 그 자체가 우리의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 물론 여기서 대단히 풍부하게 서구와 미국의 개념과 이론에서 배워야 하고 연결시켜야 한다. 단지 우리는 현대사회과학과 역사사회학이 분리되어 있고, 역사학과 사회과학이 분리되어 있다. 그런 의미에서 한 사회의 독자적인 사회과학은 언제나 역사사회과학이어야 한다고 생각된다.


이상은 점은 저의 최근 고민이고 스스로에 대한 성찰인데 한번 같이 고민해봅시다. 조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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