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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세상]왜 진보운동이 노무현과 진보를 논쟁하는가

"노무현식 언쟁에 휘말리지 말라"

[기고] 왜 진보운동이 노무현과 진보를 논쟁하는가

조대환(이윤보다인간을) / 2007년03월15일 15시34분


노무현의 도발과 ‘자칭 진보’ 열등감


최근 진행되는 진보 논쟁에서 -노무현의 표현을 쓰자면- 노무현을 흔들고 있는 사람들은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를 낳고 유지해 온 역할을 했다. 최장집 교수를 비롯한 이들은 한편에서 노무현의 신자유주의 정책에 비판적 칼날을 들이대고 있다. 김대중, 노무현으로 이어지는 초강력 신자유주의 정책은 그동안 숨 쉴 틈 주지 않고 노동자 민중을 몰아 붙였다. 사회 전반에 걸쳐서 기본권 후퇴와 실업률 증가, 노동불안정을 동반한 빈곤이 강화되었고 민주주의는 후퇴했다.


그럼에도 김대중, 노무현정권이 이어지고 유지될 수 있었던 힘에는, 중간 계층 사이에서 조정과 다리역할 심지어 브레인 역할을 해왔던 최장집 교수와 같은 지식인 그룹, 그리고 참여연대를 비롯한 중도세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최장집 교수는 노무현 정부의 비민주성을 비판하면서, 한나라당에게 정권을 넘겨주는 것도 민주주의의 한 결과라고 말했다. 지식인들 대부분은 ‘형식적 민주주의와 개혁의 유지를 위해서’라는 근거를 대면서 노무현 정부를 지지한다. 여기서 진보와 민주주의를 사전에 나오는 낱말로만 이해하고 서로 상이한 지향을 가진 자들의 도발과 열등감이 나타난다.


경제적으로 보자면 노무현은 신자유주의를 철저하게 신봉하고 진행한다는 측면, 즉 초국적 금융자본의 이해를 대변한다는 점에서 보수적이며, 한나라당은 여전히 기존 기득권․이해집단 사이의 관계에 얽매인다는 점에서 구시대적이다. 그런데도 노무현은 단순하게 한나라당과 비교해서 자신이 개혁적이며 자신만이 개혁을 유지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한나라당에 비해서 진보적이면 모두 진보적이고 자신을 지지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착각이, 도발의 원천이다.


참여연대나 조희연 교수와 같은 지식인과 중도세력들은, 노무현이 쏟아내는 신자유주의 정책에 일말의 책임감을 느끼는지 잘 모르겠지만 어째든 노무현에 대한 비판은 조심스럽다. 그래서 노무현에 대해 근본적인 비판을 수행하지 못 한다. 가만히 있으면 중간이라도 갈 것을 나서서 노무현을 옹호하거나 비판적 ‘반 비판’에 나서는 열등감을 보이기도 한다. 현 정권의 신자유주의 정책을 비판하면서도 ‘반 한나라당 전선, 반 수구 전선’을 강조하거나 노무현을 비판하는 논지에 대해서 반론을 펴는 경우가 좋은 예다.


반면 현실 민주주의 후퇴를 비판하는 지식인들 중 일부는, 민주주의를 제도․절차의 완성 정도로 바라보는 경향이 강할 뿐 자신들이 노무현 정권이라는 신자유주의 씨앗을 언제 뿌렸는지에 대한 분석은 인색하다. 이들은 진보의 내용으로 민주주의를 내세우면서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신자유주의를 비판한다. 그러나 아무리 신자유주의를 비판해도, 경제 분석과 대안세계에 대한 상이 부족하다. 이들의 ‘민주주의론’은 대안세계에 대한 결핍과, 노무현의 신자유주의 잉태에 대한 책임을 모면하려는 이율배반적인 열등감일 뿐이다.

진보가 진보다워야 진보지!


: ‘민주주의’, 그 역동성과 변혁성을 잃다!


노무현은 끊임없이 개혁의 연속성을 강조하고 한나라당에 맞서기 위한 진보진영의 지지를 호소해 왔다. 실재 많은 세력들이 이런 이유로 열린 우리당과 노무현을 지지한다. 여전히 노무현에 대한 비판에 인색하고 주저하는 이들이 많은 현실에서 최장집 교수의 비판은 어떤 면에서는 자기반성적일 수 있다. 그런 면에서는 진일보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가 내세우는 노무현 정부의 비민주성이 형식적 민주주의와 절차적 민주주의를 근거로 해서 한나라당 집권까지도 용인하는 지점에서는 좀처럼 이해하기 어려운 지점이 있다.


최장집 교수는 인터뷰를 통해서, 자신이 한나라당이 집권해도 괜찮다고 한 이야기는 “한나라당이 집권할 수 있는 객관적인 조건이라는 이야기일 뿐”이라는 해명을 하면서, 민주주의이기 때문에 그것이 가능하다는 주장을 펼쳤다. 이 말을 통해서 나는 최장집 교수가 가진 민주주의 관의 비역동성을 엿본다. 또는 그가 이야기해온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가 얼마나 현실 방기적인지 알 수 있다. 결국 그의 말은 우리 사회는 민주주의라는 뜻이다. 그리고 역설적으로 대통령이 민주주의를 실천해야 한다는 뜻일 수 있다.


최장집 교수의 말 속에서는 ‘틀’안의 민주주의만 있을 뿐이다. 그의 말 속에서 민주주의라는 가치를 지키기 위한, 실천적이고 미래 지향적인 내용과 과제로서의 민주주의는 없다. 그렇기에 노무현의 신자유주의 정책이 자행하는 민주주의 파괴에 대해서는 직접적인 언급이 없다. 즉, 완벽하지 않을 지라도 합법적이지만 일방적인 정책 시행, 집회결사의 자유마저 무시당하는 현실, 신자유주의 정책이 가져온 노동불안정과 사회 양극화가 얼마나 사회의 자유를 억압하는 지에 대해서 말이 없다.


최장집 교수는 민주주의와 진보의 가치로 노무현을 비판하지만 사실상 노무현의 무능력을 비판하는 것 이상 아무 것도 없다. 현실에 머무르는 그의 민주주의 관은 진보라고 보기 어렵다.


: 노무현이 진보를 흔드는 것은 자신이 진보이고자 함과 동시에 좌파를 제거하기 위함이다


노무현의 지지층 이탈은 노무현의 신자유주의정책으로 인한 당연한 결과다. 그런데도 노무현은 마치 진보진영이 근거 없는 비난을 하는 듯 말하고 있다. 그러면서 나름대로 생각하고 있는 ‘진보’관을 피력하고 있다. 노무현과 그 측근들은 ‘우리 사회 진보가 더 유연해야 한다’, ‘교조적 진보’ ‘양극화 해결 대책에 동참하지 않았다’는 주장을 서슴없이 하고 있다. 말이 안 되는 표현을 남발하면서도, 자신이 얘기했던 ‘좌파 신자유주의’ 같은 표현은 우스개 소리였다는 되지도 않는 변명을 하고 있다. 여기에서 노무현과 진행하는 논쟁의 무의미함이 있다. 말을 내 뱉을 때 맘대로 내 뱉고, 그 말을 다시 담을 수 있는 능력을 가진 대단한 노무현과 어떻게 논쟁이 가능한가!


노무현 측근으로 알려진 조기숙 교수는 좌파와 진보가 다르다고 역설하면서 보수적 한국사회에서 참여정부의 어려움을 토로했다. 그것은 결국 좌파와 진보를 분리하고 ‘돕지 못할망정 흔들지 말라’는 명령을 진보에게 내린다. 이것은 진보는 참여정부를 지지해야 한다는 대통령의 협박과 다르지 않다. 조기숙 교수는 좌파와 진보의 구분이 자신만의 생각이라고 조심스럽게 단서를 달지만 나는 이것이 참여정부 전체 그리고 참여정부와 ‘사회적 정의’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지식인들의 공통된 생각이라고 본다.


어느새 진보가 좌파와 우파 사이의 한 공간을 차지한 셈이다. ‘진보’가 정해져 있는 개념인가? 진보는 현실 모순을 지양하고 더 나은 미래를 지향하는 것이다. 그 자체로 좌파와 다르게 구분되어서는 안 되며 진보를 급진적(좌파)으로 할 것이냐 점진적으로 할 것이냐는, 문제 출발이 틀렸다. 결국 노무현은 진보를 참칭하면서 ‘개혁’이라는 가산점을 얻고, 좌파를 배격하면서 정권을 안정시키는 정치를 발휘하고 있다. 이런 진보 논쟁에서, 아니 그 이전에 참여정부에 진보적이거나 개혁적이라는 권한을 마음대로 부여한 지식인들도 좌파로서 진보를 말하기 보다는 중도로서의 진보를 말하고 있다.


노무현은 ‘진보가 달라져야 하며, 진보는 미래 지향적이어야 한다’ 주장을 과감하게 전개한다. 그러나 노무현이 원하는 유연한 진보를 통해서 어떻게 미래지향적일 수 있는지 의문이다. 다시 말해서 현실 신자유주의가 펼치는 악몽을 인정한 상태에서 어떻게 미래 지향적일 수 있는가? 이것이 노무현 신자유주의와 진정한 좌파가 다른 점이다.


사회변혁을 전제로 ‘진보’와 ‘민주주의’를 말하자


진보는 현실에 머무르지 않아야 한다. 이 말은 좌파적이며 사회변혁을 놓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다. 노무현이 진보진영에게 요구하는 모든 것은 우리에게 사회변혁을 포기하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또한 민주주의도 제도와 절차의 완성으로만 바라본다면, 우리는 진보된 민주주의를 맞이할 수 없다. 민주주의는 하나의 규격화된 공산품이 아니다. 사회평등과 인간다운 세상을 위한 관계와 방식을 만들어가는 것이고 그 과정에 따르는 몇 가지 제도가 있을 뿐이다. 최장집 수준의 민주주의론에 근거한 노무현 비판의 무의미하다는 이유가 이 것이다.


사회변혁을 전제로 하지 않고 있는 노무현과 지식인들의 진보 논쟁은 그래서 알맹이가 없고 함정에 빠질 수밖에 없다. 그런 면에서 사회변혁 없는 진보와 사회변혁 없는 민주주의는 동일하다. 다시 말해서 노무현과 최장집은 별로 다른 이야기를 하지 않고 있다.


현재 논쟁은 노무현의 파쇼 수준의 신자유주의 정책과 열린우리당 수준의 개혁구도를 유지하고자 하는 중도 지식인들, 사회변혁을 제거한 민주주의론으로 좌파의 입지를 죽이려는 지식인들, 그 사이의 사상적 혼란일 뿐이며 그곳에서 나온 다양한 가지일 뿐이다. 이제 대선 국면으로 갈수록 이 가지는 정리될 것이며, 최장집 수준의 민주주의와 한라라당에 맞서는 개혁세력연합으로 구도가 유지될 것이다. 그렇지만 이 둘은 적대적일 수 없다. 아주 우연한 결과이든, 심오한 정치구도이든, 노무현과 지식인들이 벌이는 논쟁은 이렇게 대선을 몇 달 앞둔 시점에서 일종의 역할 분담이다.


사실상 사회변혁을 갈망하는 좌파는 대중적 언어로 사용하던 ‘진보’마저 앉아서 강탈당한 꼴이다. 이번 진보 논쟁에서 노무현식 언쟁에 휘말리지 말고 근본적인 사회변혁운동을 전개해야 하는 필요성을 찾는 것이, 우리가 얻어야할 교훈이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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