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의 재구성, ‘사회적 공화주의’에 대한 짧은 생각
[기고] 한국사회당의 사회적 공화주의에 대하여
이광일(성공회대) / 2008년01월17일 17시41분
출처 : 참세상
대선 이후 한국사회당 안에서 대선결과에 대한 평가와 맞물려 ‘사회적 공화주의’가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이것은 강령을 둘러싼 것이라는 점에서 한국사회당의 향후 정치적 행보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 중요한 문제이다. 나아가 한국사회당의 행보가 지금 전면화되고 있는 진보정치의 재구성과도 연관되어 있기에 이 논쟁은 더욱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번 대선에서 왜 한국사회당은 ‘사회적 공화주의’를 내세웠을까. 그 이유를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그 강령에 따르면 헌법에 명시된 ‘민주공화국’이 빈껍데기뿐인 ‘민주공화국’이기 때문이다. 주권자들은 국가사회 및 정치에서, 사회경제적 영역 등에서 배제되어 공화국의 주권자로서 자신을 실현할 기본요건을 보장받고 있지 못하다. 그리고 지금 그 현실은 신자유주의에 의해 더욱 확대, 심화되고 있다. 따라서 ‘사회적 공화주의’는 ‘사회적 공화국’을 즉각적으로 실현하여 그 구성원들이 진정한 주권자로 설 수 있도록 최소한도의 사회경제적 제반 요건을 보장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 한국사회당의 금민 후보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 바 있다.
“국민 모두의 보편적 복지는 일차적으로 국가가 제공해야 한다는 것이 사회적 공화국의 구성 원리다. 모든 국민의 제반 사회적 기본권에 대한 국가의 적극적인 보장이야말로 국민주권 원칙과 민주공화국 질서의 전제조건이라는 것은 노무현 대통령 스스로 인지해야 할 바다.”
그렇다면 이 ‘사회적 공화주의’는 어떤 문제점을 지니고 있는가.
먼저, ‘사회적 공화국’과 ‘민주공화국’의 관계와 진보정당의 강령으로서의 적절성 여부이다. 한국사회당 강령에서 확인되듯 ‘사회적 공화국’은 ‘민주공화국’의 실현을 위한 전제인 만큼 그것은 이른바 ‘이행기 국가’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그 이행의 과정이 2단계인지, 3단계인지, 그 이상이 될지, 아니면 하나의 긴 장기과정이 될 지 알 수 없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민주공화국’이 그 상위에 존재하는 목적이라는 것이다. ‘사회적 공화국’이 실현되면, 최소한 ‘민주공화국다운 공화국의 시대’가 열리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한국사회당의 ‘최대 강령’이 ‘민주공화국’의 건설이고 그 ‘현실 강령’이 ‘사회적 공화국’의 건설이라고 할 때, 이러한 강령이 한국사회당의 정체성을 온전히 드러내주지 못한다는데 있다.
그 이유는 한편으로 ‘민주주의’, ‘공화국’에 대한, 혹은 그것들의 통일체인 ‘민주공화국’에 대한 상이한 인식 여부와 무관하게 ‘민주공화국’ 그 자체를 부인하는 사회정치세력들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즉 자유주의정치세력들도, 사회주의자들도 ‘민주공화국’을 자신들의 이상으로 말하고 있으며 그것의 실현을 정치적 목표로 삼는 것에 대해 주저하지 않는다. 물론 이러한 현실은 분열된 역사적 사회관계 속에 존재하는 민주주의가 단수가 아닌 복수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어떤 이들에게 민주주의인 것이 어떤 이들에게는 비민주적, 반민주적일 수 있으며 심지어 독재일 수도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다른 한편 어떤 정치세력들도 ‘사회적 공화주의’가 말하는 내용, 즉 최소한의 기본 조건들을 보장하여 주권자가 공화국의 구성원에 걸 맞는 ‘공적인 일’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주장을 부정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사정이 이렇기에, ‘민주공화국’, ‘사회적 공화국’의 건설이라는 최대, 최소강령은 ‘새로운 진보’를 자임하는 한국사회당의 ‘차별화된 정체성’을 대중에게 효과적으로 각인시킬 수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런 현상이 벌어졌을까. 그것은 ‘사회적 공화주의’가 헌법에 보장된 민주공화국을 민주공화국일 수 없게 만든 ‘부당한 현실’을 문제시하고 그것을 넘어서고자 하면서도, 나아가 공화국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지 못하는 현존 국가를 넘어서고자 하면서도 그것들이 어떠한 비대칭적, 억압적 사회관계들, 그리고 그 안에 내장된 권력관계들을 매개로 재생산되고 있는가에 천착하지 않은 결과로 보인다.
그런데 헌법에 명시된 민주공화국은 추상적인 존재가 아니라, 오직 이러한 현실의 관계들을 매개로 해서만 이러저러한 모습으로 자신을 드러낸다. 따라서 그러한 관계들에 주목할 때만이 ‘민주공화국’, 아니 즉각적인 현실 목표로서의 ‘사회적 공화국’으로 가는 도정에 놓여 있는 장애들을 더욱 구체적으로 인식할 수 있다. 강령은 바로 이러한 모순과 긴장의 관계들을 해소, 극복하기 위한 방안과 전망, 즉 정치를 집약해 놓은 것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사회적 공화주의’ 강령에는 이런저런 ‘정책들’만 있을 뿐 모순과 긴장을 해소, 극복할 정치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이행의 전략도 보이지 않는다. 바로 이 지점에서 왜 그 비판자들이 ‘사회적 공화주의’를 ‘국적 불명’의 강령이라고 말하는지, 왜 자본-임노동관계를 한 치도 건드리지 않고 있다고 비판하는 지 그 이유를 다시 한 번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 그것은 단지 연기금의 사회책임투자를 둘러싼 논의로 환원될 성질의 것이 아니다.
둘째, 빈껍데기인 현실의 민주공화국을 넘어서기 위해 ‘사회적 공화주의’가 제시하는 것으로서의 ‘배제 없는 통합’, 즉 ‘탈배제의 통합’에 내장되어 있는 자기 딜레마이다. 한국사회당 선대본의 대변인은 당내 논쟁과정에서 ‘사회적 공화주의’가 지향하는 ‘총체적 대안모델’이 무엇이며 양자의 관계는 어떻게 설정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답하고 있다.
“새로운 사회 구성 원리를 ‘배제 없는 통합’이라고 봅니다. ‘현실 사회주의에서도 겹겹이 존재했던 배제’가 없는 통합이 새로운 사회의 구성원리일 것입니다. 이는 현재의 강령에도 나옵니다. 그러나 그와 같은 ‘배제 없는 통합’의 구체적인 상은 현재로서 제출되기 어렵다고 봅니다. 단지 ‘배제를 극복하기 위한 운동’을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탈배제 운동의 현 시기 목표로서 제시된 것이 ‘사회적 공화주의’의 위상이라고 봅니다.”
하지만 필자가 보기에 이러한 언술은 솔직하지 못하다. 왜냐하면 이 ‘배제 없는 통합의 구체적인 상’, 혹은 ‘총체적인 상’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무엇으로 개념 규정하든 내용적으로 ‘꼬뮨’일 것이다. 그 이유는 최소한 근대 이후의 역사에서 ‘동일성’에 근거한 ‘배제’는 ‘현실 민주주의’를 구성하는 핵심원리로 재생산되어 왔으며 지금도 그런 바, 이것이 해소·극복된 미래의 사회는 오직 ‘꼬뮨’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사회적 공화주의’는 자신들의 추구하는 미래의 사회상을 ‘꼬뮤니즘’, 혹은 그에 상응하는 그 어떤 개념으로 말하지 않는다. 다만 그것은 누구도 부인하지 않는 ‘민주공화국’으로 표현될 뿐이다. 왜 그런지는 알 수 없지만, 만일 그것이 먼 미래의 과제이고 따라서 단지 ‘꼬뮤니즘’을 명기하는 것이 내용 없는 추상선언일 수 있기에, 아니면 ‘역사적 공산주의’로부터 연유하는 ‘꼬뮤니즘’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가 대중에게 두려움을 줄 수도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이라면, 한편으로 대중정당으로서의 한국사회당의 위상을 고려하여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지만, 다른 한편 궁색하다는 인상 또한 지울 수 없다. 그 이유는 이미 많은 지식인들, 활동가들이 지금 ‘꼬뮤니즘’을 재전유하고 있기에 그렇기도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진보정당의 강령은 현실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향후 실현될 미래를 보여주는 것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 필자가 ‘탈배제 운동’을 통한 ‘사회적 공화주의’에 이런저런 모순과 긴장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급진민주주의의 또 다른 정치적 판본’이라고 파악했던 것도 ‘꼬뮨’을 향한 가능성이 거기에 존재한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탈배제의 사회적 공화주의’는 이에 대해 숙고하지 않거나 외면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만일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사회적 공화주의’가 이에 대해 효과적으로 설명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거나 ‘탈배제의 운동’을 ‘꼬뮨’으로까지 연결시키는 필자가 ‘사회적 공화주의’를 잘못 독해하여 그것을 과잉평가한 때문일 것이다. 즉 ‘제도로서의 정치, 정당을 통한 탈배제운동이 가능한가?’라는 질문에 대해 심사숙고하지 못한 필자의 미숙함 때문일 것이다.
여하튼 자본주의 사회에서나 붕괴된 ‘역사적 사회주의’에서도 ‘배제’는 다양한 사화관계들 속에서 재구성되어 왔기에 ‘총체적 대안모델’의 제시 요구와 관련, 현 단계에서는 ‘단지 배제를 극복하기 위한 운동만을 말할 수 있다.’고 언급한 것은 결코 틀리지 않다.
하지만 그것은 어느 사회, 어느 역사 모두에 해당된다는 점에서 기실 아무 것도 설명해 주지 못한다. ‘꼬뮤니즘운동’의 강령이라면 모를까, 그렇지 않은 제도 안 진보정당의 강령으로서는 효과적이지 못하다. ‘배제 없는 통합’을 부정할 정치세력들이 이 세상 어디에 존재하겠는가. 이런 맥락에서 한국사회당의 ‘탈배제 통합’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분명히 드러내기에는 매우 부족하고 애매모호하다.
강령이 무엇인가. 특히 진보정당을 자임하는 정당의 강령이라면, 경쟁하는 여타 정치세력들과의 차이를 분명히 드러내 줄 수 있는 그런 개념과 내용으로 구성되어야 하는 것 아닌가. 만일 ‘사회적 공화주의’ 대신에 ‘사회주의’ 혹은 ‘사민주의’를, ‘민주공화국’ 대신에 ‘꼬뮨’을 쓴다면, 이에 대한 반응들은 어떨까. 그 실행 가능성 여부와 무관하게 모든 정치세력들이 여기에 공감하고 동의할 수 있을까. 다시 한 번 곱씹어 볼 필요가 있다.
셋째, 이와 관련 ‘탈배제운동’의 현 시기 즉각적 목표가 ‘사회적 공화주의’라면, 그것의 실현은 무엇으로 입증될 수 있는가. 이것은 ‘사회적 공화주의’를 먼 미래의 것이 아니라 현 시기에 실현해야 할 즉각적 목표로 설정하고 있기에 제기되는 질문이다. 즉 ‘사회적 공화국’이 실현되었다는 것을 입증할 수 있는 준거가 필요한데, 그 목록을 구성하는 것이 여의치 않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회적 공화주의’에 의거할 때, 그것의 실현 여부는 이런저런 권리들, 특히 사회권을 보장하는 법, 제도 등의 구비로 나타날 터인데, 그것이 ‘사회적 공화국’의 실현을 충족시키고 있는지 여부는 어떤 사회정치적 세력들의 입장에 서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질문하면, ‘사회적 공화국’이 주권자를 주권자이게 할 조건으로 보장해야 한다고 말하는 ‘보편적 복지’는 무엇을 기준으로 한 어떤 내용의 것인가.
하지만 이것이 ‘즉각적 목표’인데도 ‘사회적 공화주의’는 이에 대해 어떤 대답도 할 수 없다. 왜 그럴까. 그 이유는 결국 법, 제도들로 나타날 그러한 준거들이 계급관계와 그것으로 환원되지 않는 여타 긴장과 갈등의 사회관계들의 산물이기 때문에 그렇기도 하겠지만, 무엇보다 ‘탈배제 운동’에서 중요한 것은 그 공화국의 실현이 아니라, 그것이 실현되는 바로 그 순간 그것 자체가 이 운동의 ‘극복의 대상’으로 전화한다는 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즉각적인 과제로서의 ‘사회적 공화국’의 상 또한 자신의 역사적 과제를 엄격히 규정하지 않는 한, 그것을 구체적으로 그려낸다는 것은 쉽지 않다. 이런 측면에서 한국사회당의 강령은 구체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너무 추상적이다. 아니 추상적일 수밖에 없다.
넷째, ‘사회적 공화주의’는 모자이크식 강령으로 ‘자기의 내용’이 빈곤하다. 이와 관련, 이미 언급했듯이 ‘탈배제를 위한 운동’은 분열된 역사가 지속되는 한, 즉 ‘민주공화국’-필자는 ‘탈배제운동’의 성격상 ‘꼬뮨’이라는 개념이 더 어울릴 것으로 생각한다.-이 도래할 때까지 계속 될 것이기 때문에 현 단계 정치적 목표로 설정된 ‘사회적 공화국’도 그 어느 시점에서는 ‘탈배제 운동’의 대상이 된다. 이것은 ‘사회적 공화국’이 단수가 아니라 ‘사회적 공화국’1, 2, 3,.. 등 복수일 것임을 의미한다. 즉 ‘사회적 공화국들’이다. 필자가 앞에서 ‘사회적 공화주의’에서는 ‘배제 없는 통합의 사회’에 도달하기 위해 몇 단계를 거쳐야 하는지, 아니면 그것이 하나의 장기과정일지 알 수 없다고 말한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그것들의 성격과 위상을 기존에 통용되는 개념으로 불러 본다면, 그 내용상 어느 것은 ‘신자유주의 좌파국가’에, 어느 것은 스칸디나비아반도 식의 ‘복지국가’에, 어느 것은 ‘사회주의국가’ 등에 해당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사회적 공화주의’는 자기의 내용을 지니고 있지 않으며 여러 내용 혹은 여러 강령에 담겨 있는 내용의 모자이크식 조합이라는 인상을 주기에 충분하다. 즉 기존의 여러 내용을 공화주의의 본래 의미를 부각시키며 재구성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에 그 내용을 분리시키면 남는 것은 오직 ‘공화주의’에 대한 재해석일 뿐이다.
다섯째, 이와 관련 국가 자체가 공공선이 아닌 이상, 그리고 ‘사회적 공화주의’가 이를 부정하지 않는다면, 국민 모두의 국가, 국민공통성이 보장되는 국민공통의 국가가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과연 ‘사회적 공화주의’의 실현인 ‘사회적 공화국’을 통해 근대국가를 넘어서는 ‘생태국가’를 구성하겠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오히려 이미 지적한 바대로 바로 그러한 목적을 위해 ‘사회적 공화주의’, 그 실현인 ‘사회적 공화국’은 극복되어야 할 대상은 아닌가. 더 많은 논의와 숙고가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지난 대선 과정에서 ‘사회적 공화주의’가 창조한국당의 “사람중심 진짜경제”에 환호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단지 우연이었는가. ‘사회적 공화주의’가 즉각적으로 실현해야 할 현실의 정치 강령이고 이미 언급했던 것처럼 그것의 실현을 판단할 준거를 획정할 수 없다면, 거기에는 자본주의라는 경계 안에서 ‘공적인 역할’을 강화하고자 하는 모든 형태의 국가가 포함될 수 있다. 물론 이 때 유일한 준거는 지금 현존하며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는 ‘민주공화국’이다.
따라서 ‘사회적 공화주의’의 시각에서 볼 때, 특히 공적인 것의 역할, 즉 공화주의의 참된 의미가 현저히 축소되는 신자유주의 시대에, 그것이 초래한 문제점을 비판하는 창조한국당의 “사람중심 진짜경제”와 그에 근거한 정책들은 ‘탈배제 운동’의 하나로 설정될 수 있다. 왜냐하면 그 강령에서 설명하고 있듯 ‘배제’의 양태는 다양하기에 그에 대응한 ‘탈배제 운동’ 또한 ‘다양한 내용과 형식’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자유주의경쟁국가 아래에서 창조한국당의 “사람중심 진짜경제”, 그에 입각한 정책들-비정규직문제 해결을 위한 노동자교육, 재해관리, 환경 및 생태에 대한 강조 등-은 현 시기 실현 목표로서의 ‘사회적 공화국’으로 나아가기 위한 ‘탈배제 운동’의 중요한 구체적 목록이 될 수 있다. 바로 여기에 창조한국당과 한국사회당 사이에 교감이 존재할 수 있는 공간이 존재한다. 비록 ‘사회적 공화주의’를 입안한 주체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지라도 그 강령 속에는 한국사회당의 ‘우경화’를 우려하는 것이 기우가 아님을 말해주는 근거들이 여기저기 산재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사회적 공화주의’가 ‘탈배제의 운동’을 결국 그 운동의 성과인 ‘사회적 공화국’마저도 끊임없이 재구성해 나가는 ‘운동으로서의 민주주의’, ‘운동으로서의 꼬뮤니즘’으로 이해했다면, 그리고 이런 맥락에서 ‘급진민주주의적 의제들’을 중심적으로 제기했다고 한다면, 과연 창조한국당의 ‘사람중심 진짜경제’에 대해 그토록 환호할 수 있었겠는가. 기우에서이지만 정책연대의 가능성을 닫아 놓자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사안에 따라 다르겠지만, 창조한국당은 물론 심지어 한나라당과도 가능한 것이다.
지금 한국사회당의 ‘사회적 공화주의’에 대해 새삼 짧은 소회를 밝히는 것은 긴장과 모순투성이인 이 강령의 옳음과 그름, 혹은 그 적실성을 따지기 위한 것에 있지 않다. 물론 이것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이유는 진보정치의 재구성 문제가 전면에 제기되고 있는 상황에서 한국사회당이 더욱 치열하게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희망과 기대 때문이다. 어디로 귀결될지 모르지만 민주노동당이 그 동안의 한계를 고백하면서 ‘진보의 재구성’을 역설하고 있다. 일부는 한발 더 나아가 새로운 진보정당의 창당을 기정사실로 하는 인상이다. ‘계급적 좌파들’, 그와 긴장관계에 있으면서도 서로 소통하는 ‘비계급적 좌파들’ 또한 지금이 진보정치의 재구성을 위한 중요한 기회라는 점에 모두 동의하고 있다.
그런데 대중은 한국사회당의 대선후보가 어떻게 결정되었으며 ‘사회적 공화주의’가 어떤 과정을 통해 산출된 것인지 몰랐던 것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지금 한국사회당이 무엇을 하는 정당인지, 대선에서의 패배 이후 그 안에서 어떤 성찰적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그렇다면 지금 한국사회당이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대선 이후 필자가 여러 차례 강조하였지만, 한국사회당은 민주노동당의 상황을 관전하며 ‘관전평’을 내놓을 입장에 있지 않다.
그런데도 ‘한국사회당’은 자신들의 정치적 행보와 현 존재에 대해 성찰하기보다 스스로를 방어, 옹호하는데 관심이 있는 듯하다. 이런 분위기가 지속된다면, 그 진위 여부와 무관하게 민주노동당 사태를 계기로 전면화된 ‘진보정치의 재구성’이라는 화두에 편승하여 거기에서 무엇인가를 얻으려 하고 있다는 인상을 불식시키기 어려울 것이다. 무엇보다 지금은 모든 진보정치세력들이 과감하게 자기한계를 고백하면서 얼굴을 맞대야 할 시점이다. ‘사회적 공화주의’ 강령을 가지고 이번 대선에서 0.07%를 얻은 한국사회당은 더 말할 나위 없다. 더욱 치열하게 논의하여 문제를 드러내고 그것을 대중과 공유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이것이 자신을 새로이 세우는 것이고 그렇게 할 때만이 ‘진보의 위기’를 기회로 변화시킬 수 있는 가능성 창출의 과정에서 의미 있는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니 더 냉정하게 말한다면 그렇게 해도 대중과의 소통이 이루어질 수 있을지, 과연 ‘진보의 재구성’이 가능할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는 것이 지금의 엄정한 현실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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