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혁당 재건위 사건 민주열사 32주기 추모제>
- 일시: 2007년 4월 9일 오후3시
- 장소 :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사형장 앞 잔디밭)
- 주최 : 인혁당재건위 사건 민주열사 32주기 추모제 준비위원회
- 후원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 참가단체 : 민족문제연구소, 민족문학작가회의 자유실천위원회, 민족민주열사회생자추모단체연대회의,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 민주화를위한전국교수협의회,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 민청학련.인혁당진상규명위원회, 민청학련운동계승사업회, 불교인권위원회, 사월혁명회, 성공회대학교 민주주의와사회운동연구소, 성공회대학교 민주자료관, 소위인혁당재건위사건진상규명및명예회복을위한대책위원회, 5.18기념재단, 올바른과거청산을위한범국민위원회, 6.15남북공동선언과한반도평화를위한통일연대, 이수병선생기념사업회, 인권단체연석회의, 전국목회자정의평화실천협의회,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전국민중연대, 천주교인권위원회,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천주교정의구현전국연합, KNCC정의평화위원회, 한국교회인권센터, 한국민족극운동협회,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회, 한국진보연대(준) - 가나다순
<관련기사>
‘인혁당’ 유족 “모래알 씹듯 쌀 씹고 살았다”
32년만의 무죄…‘간첩가족’ 숨죽인 세월에 마른울음 꺽꺽
1975년 4월9일. 당시 마흔 한살, 5남매의 엄마였던 이영교 씨는 남편 하재완(당시 42살)씨를 면회하기 위해 서대문형무소로 향하고 있었다. 남편은 전날 이른바 ‘인혁당 재건위’ 사건에 연루돼 대법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정말 죽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남편은 1년 전 목욕탕에 간다며 집을 나섰다 사라졌을 때도, 석달만이지만 비상보통군법회의에 수의를 입은 채로 살아서 나타났었다. 하지만 사형이 선고된 지 17시간 만에, 이씨가 서대문 형무소에 도착하기도 전에 남편은 세상을 떠났다. 한국 사법 역사상 씻지 못할 오명으로 남은 ‘사법 살인’이었다. 남편의 사형집행 소식에 정신이 혼미해진 이씨는 실신했고, 명동성당으로 옮겨졌다. 남편의 마지막 모습조차 확인하지 못했다.
그로부터 32년만인 23일 오전 9시50분. 일흔 셋, 피맺힌 지난 세월을 감추듯 백발을 염색으로 감춘 이씨는 재심 선고가 예정된 서울중앙지법 311호 법정에 모습을 드러냈다. 남편의 ‘무죄’를 예상한 듯, 당시 하씨와 함께 사형이 집행된 고인 7명의 가족들, 시민단체 관계자들과 함께 환하게 웃는 모습이었다. 들뜬 가운데 숨막히는 법정.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3부 문용선 재판장이 하씨 등 8명의 ‘무죄’를 선고했다. 32년 동안 밝혀지길 고대했던 ‘진실’이 단 20여분만에 세상을 향해 선고됐다. 침착함을 잃지 않았던 이씨는 이내 참았던 눈물을 터뜨렸다.
이씨는 “쌀 씹는 것을 모레알 씹 듯하며 살아왔다”며 지난 세월을 돌이켰다. 남편이 숨진 뒤 이씨 가족에게는 예상대로 ‘빨갱이 가족’이라는 낙인이 찍혔다. 이씨 집 주변에는 항상 낯선 사내들이 항상 서성거렸다. 이사를 수도없이 다녀도 ‘남편이 유명한 빨갱이’라는 소문은 삽시간에 온 동네에 퍼졌다. 하지만 이씨는 ‘간첩 자식’이라고 새끼줄에 목을 매달려 끌려다니며 놀림받는 불쌍한 5남매를 위해서라도 죽을 수 없었다. “처음엔 집 팔고, 있는 돈을 다 까먹으면서 간신히 생계를 유지했지. 하지만 오래 가지 못했어. 미역이며 뭐며 행상으로 내다 팔았고, 가전제품 외판원도 하고, 밤새 미싱을 돌려 옷을 만들어 팔며 아이들을 가르쳤지.”
하지만 이씨는 아이들을 잘 키우는 것만으로 만족할 수 없었다. 그는 남편의 누명을 벗기기 위해 송상진씨의 아내 김진생씨, 도예종씨의 아내 신동숙씨 등과 함께 문정현 신부를 찾아가 매달렸고, 김형태 변호사를 소개받았다. 이씨는 “김형태 변호사는 진짜 법을 아는 분이고, 진짜 정의로운 분 같아서 ‘변호사님 믿어주세요’라며 몇번을 찾아가 애원했다”는 기억을 떠올렸다. 이씨는 결국 지난 2005년 12월27일 김형태 변호사 등과 함께 서울중앙지법으로부터 인혁당 사건 재심 결정을 받아냈고, 32년 만인 23일 남편의 진실을 증명해보였다.
이씨 이외에 신동숙(도예종씨 아내), 김진생(송상진), 이정숙(이수병), 강순희(우홍선), 유승옥(김용원)씨 등 미망인들도 이날 노구를 힘겹게 추스리며 법정에 나왔다. 강순희씨는 선고가 끝난 뒤 “아이고 분해, 아이고 분해”라며 연신 마른 울음을 쏟아내다 탈진한 듯 주저앉기도 했다. 또 신동숙씨는 “남편이 죽은 뒤 빨갱이 오해를 살까봐 아무도 나를 만나주지 않았다”며 “혼자 집에 틀어박혀 사느라 말을 제대로 못해봐서 지금은 말도 똑부러지게 못하는 사람이 됐다”고 한스러워했다. 하지만 신씨는 “이번 판결을 계기로, 군사독재 시절 다른 고문조작 사건들도 진실이 밝혀졌으면 좋겠고, 남편이 그토록 원하던 통일도 앞당겨졌으면 좋겠다”며 죽은 남편의 뜻을 기렸다.
한겨레 전정윤 기자 ggu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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