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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아시아 민주주의, 곳간 먼저 챙겨라

아시아 민주주의, 곳간 먼저 챙겨라

동아시아와 한국 - 민주화와 민주주의의 위기를 넘어

조희연·박은홍 엮음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 317쪽 | 1만3000원

김호기 연세대 교수·사회학


근대사회의 개막 이래 민주화 또는 민주주의는 서구사회뿐만 아니라 비(非)서구사회에서도 나아가야 할 길로 제시돼 왔으며, 아시아 각국들에서도 이를 둘러싼 노력이 지속돼 왔다. 하지만 최근 민주화의 도정에 있는 아시아의 많은 정부들이 위기에 직면해 있다. 왜일까. 민주주의는 규범적 당위임에도 불구하고 왜 위기에 빠지는 것일까. 이 책은 바로 이 질문에 답변하고자 한다.


이 책에 참여한 아시아 각국의 민주주의 연구자들은 민주정부의 위기와 그 해결경로의 다양성을 분석하고 있다. 먼저 조희연 교수는 이 책의 전체 내용을 안내하는 "한국 '민주정부'의 위기에 대한 연구"에서 우리 민주정부의 포스트-공고화 과정에서의 위기를 주목한다. 그는 민주정부의 위기의 본질이 '정치적 탈(脫)독점화, 경제적 탈독점화, 사회적 탈독점화의 복합적 상호작용의 갈등'에 있다고 보고, 이에 따라 기득권 세력의 '민주주의적 저항'과 사회경제적 하위주체들(소외집단)의 새로운 저항이 동시에 분출해 왔다고 진단한다. 그에 따르면, 민주화 과정에서 나타나는 다층적 갈등구조에 중요한 두 가지 매개변수는 신자유주의 지구화와 민주정부의 전략 및 개입능력이다. 먼저, 신자유주의 지구화는 이중의 효과를 가져 온다. 그것이 한편에서 시민사회의 주체적 활성화에 의해 획득된 복지제도나 노동시장의 반(反)유연화 제도를 해체시키고 국가의 친자본적 정책을 촉진한다는 점에서 민주주의의 약화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면, 다른 한편에서는 국민국가의 상대화를 통해 국가에 의해 억압돼 온 다양한 사회적 약자들의 요구를 표출시키는 결과를 낳고 있다. 이어, 과거 독재세력이 '국가조합주의' 방식으로 다양한 사회집단들을 통제했다면, 민주정부는 '민주적 방식'으로 사회통합을 이뤄내야 하며, 이 때 정부의 전략과 개입능력의 중요성이 부각된다는 것이다.


한국 민주정부 하에서의 새로운 균열과 갈등은 다음의 두 가지 특징을 갖는다. 첫째, 민주개혁의 '수평적 확산'이 한계에 봉착하고 국민적 합의가 광범위하게 존재하는 개혁이 종결됨으로써 국민적 합의의 '경계' 자체가 갈등의 대상이 된다. 예를 들어 국보법 폐지, 양심적 병역거부, 호주제 폐지, 수도 이전 같은 이슈들은 보수 세력의 입장에서는 국민적 합의를 넘어서는 개혁의 '과잉'으로 이해되지만, 민주세력의 입장에서는 민주개혁의 '철저화'로 인식된다.


둘째, 민주정부의 '개혁'정책에 내재된 한계다. 조교수에 따르면, 이 한계는 '국가의 자유민주주의적 정상화'가 자본주의 축적구조의 민주화를 동반하지 못했다는 데서 비롯된다. 외부적으로 신자유주의 지구화와 내부적으로 자율과 국제경쟁력 강화 등의 담론으로 무장한 자본의 저항, 이를 상쇄하는 적절한 사회경제적 정책을 도입하지 못한 민주정부의 한계가 서로 결합되면서, 비정규직 양산이나 소득분배의 악화 등 새로운 문제들이 나타나게 되었고, 이것은 역으로 민주정부의 위기로 외화되었다는 것이다.


주목할 것은 이런 민주정부의 위기에 대한 분석에서 나아가 조교수가 2007년 대선 이후 한국에서의 '신보수 정권'의 등장을 분석하고 있다는 점이다. 조교수에 따르면, 한국사회는 두 집단이 교착상태에 놓여 있는데, 한 집단이 개발독재 및 1987년 이후 성장한 계급적·사회적 기득권 세력이라면, 다른 하나는 높은 수준의 평등주의 의식을 가졌고 민주화 20년, '민주정부' 10년에 실망한 대중들이라 할 수 있다. 새롭게 등장한 신보수 정권의 시대가 '우회의 시기'가 될지, 아니면 일본과 같은 '55년 체제'의 장기지속으로 나타날지 예단하기는 아직 어렵다고 조교수는 지적한다.


이 책에 실린 다른 필자들 역시 민주화 및 민주주의의 공고화 과정에서 각 사회가 보여주는 특징에 주목한다. 편자의 관심을 끌었던 사례들은 대만, 인도네시아, 태국이다. 대만의 경우 국민당으로부터 민진당으로의 정권교체가 민주화의 진전으로 평가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민주주의 정당성에 대한 국민적 지지가 후퇴했는지를 분석하고 있다면, 인도네시아의 경우는 민주화 과정에서 '좋은 통치구조'를 만들기 위한 제도적 혁신으로서의 직접 지방선거가 약탈적 지역엘리트들의 권력을 공고화시키는 역설을 추적하고 있다.


태국의 사례를 분석하고 있는 자일스 짜이 응파껀은 태국에서 자유주의가 어떻게 민주주의를 손상했는지를 주목한다. 빈곤층을 위한 케인즈주의적 경제발전과 신자유주의의 이중궤도 전략을 보여주었던 탁신 총리에 대한 9·19 쿠데타는 엘리트층과 중간계급의 지지를 받았는데, 이는 자유주의 세력이 군사독재와 결탁하게 된 태국 민주주의의 퇴보를 보여준다는 것이다. 한편, 필리핀에 대해서는 민주화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지속되는 정치·사회·경제적 독점에 대해서, 말레이시아의 사례에서는 권위주의가 지속되고 있는 이유에 대해서, 버마(미얀마)의 사례에서는 사회운동의 중요성에 대한 분석이 이뤄지고 있다. 이 책의 저자들이 제시한 결론은 사회·경제적 민주화가 이루어지지 않은 민주주의란 결국 정체되거나 후퇴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이런 맥락에서 편자들은 우리 사회의 경우 역시 소득분배의 악화와 양극화의 심화가 제어되지 않는다면 실질적 민주주의의 확립은 요원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런 주장은 이번 대통령선거의 결과를 돌아보면 설득력이 높은 것으로 보인다.


민주화 시대가 마감하는 현재, 정작 사회·경제적 민주화의 중요성이 부각되는 것은 한국 민주화 과정의 역설이자, 크게 본다면 아시아 민주화 과정의 역설이기도 하다. 사회경제적 영역의 민주화가 이뤄지지 않는 한 민주화는 미완의 기획이다. 이번 대선을 통해 우리 사회의 주역은 진보 세력에서 보수 세력으로 변화됐다. 그렇다면 새롭게 출범하는 신보수 정부는 사회·경제적 민주화에 어떤 기여를 할 수 있는가. 한국 민주주의는 새로운 시험대 위에 올라 선 셈이다. 민주주의에 여전히 관심이 높은 이들에게 일독을 권하고 싶다.


입력 : 2008.01.25 2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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